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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09. 2019

드디어 친구가 생겼다

6/13 Day. 5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심장이 계속 뛰어서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했다. 드디어 조금 자보려고 하는 찰나 호텔 복도에서 믿기 힘든 소란이 벌어졌다. 내가 묵고 있는 8층에는 인도에서 여행 온 대가족이 여러 개의 방에 나누어 묵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느 커플이 마구 싸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환갑잔치 애프터 파티 분위기로 온 가족이 다 복도로 기어 나와서 서로서로 애정이 듬뿍 담긴 대화를 시작했다. 백화점 세일 기간에 물건을 팔아도 이것보다 조용하다 싶었다. 아니 비행기 이착륙 소리도 이거보다 작겠네. 어른들 뿐 아니라 그들의 어린 아이들도 이 대화에 동참했는데, 도대체 새벽부터 무슨 힘이 그렇게 나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떠드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 기가 막혀서 언제까지 떠드나 기다렸더니 대략 한 시간을 그러고 있었다. 말하는 중간 중간 자신들의 방문을 이백 번 정도 쿵쾅쿵쾅 열고 닫았다. 그러니까 이게 오늘 새벽 5시부터 6시까지 벌어진 일이다. 중국 사람들도 시끄럽지만 적어도 남들 다 자는 새벽에 그렇게 떠든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민폐 부분에서는 인도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고 본다.      


애니웨이, 


150바트를 내고 처음으로 조식을 먹었다.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의미 외에는 특별할 구석은 없었다. 나는 맛집 탐방과 디저트 카페 탐방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이번 기회에 알았다. 쇼핑은 한국에서도 잘 하지 않는다. 그걸 빼고 나니 방콕 가이드북은 읽을 게 정말 하나도 없었다. 우연히 스트리트 아트로 유명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내일이나 모레 쯤 찾아가 볼 생각인데 너무 더워. 바로 근처 커피 클럽은 가기 싫고(자꾸 뭐 더 시키라고 말 걸어서 귀찮다. 난 배가 부르고 커피만 한 잔 마시고 싶다고), 방은 청소해야 해서 아침부터 수영장으로 올라왔다. 모히토와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를 마시며 가져온 책 중 내키는 대로 꺼내 들었다. 한참 읽다가 여행에 대한 기가 막힌 구절을 찾았다.      


여행은 여행이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모든 석양은 그저 석양일 뿐인데 그것을 보러 콘스탄티노플까지 갈 필요는 없다. 여행을 하면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나는 리스본을 떠나 벤피카에만 가도 자유를 느낀다. 리스본을 떠나 중국까지 간 어느 누구보다 강렬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 안에 자유가 없다면 세상 어디에 가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의 책 p.138      


여행은 느낄 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 책자는 경험을 풀어놓은 책으로서 항상 부족한 면이 있기 마련이다. 여행기의 가치는 글쓴이의 상상력에 비례한다. 우리 모두는 내면을 들여다볼 때를 제외하고는 다 근시안이다. 오직 꿈을 꿀 때에만 제대로 볼 수 있다. -불안의 책 p.123  

    

한참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유년기를 제외하고는 평생 리스본 바깥으로는 나간 적이 없다는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책을 읽었다. 평소에 잘 읽히지 않는 책과 아주 잘 읽힐 법한 책을 섞어서 가져왔는데, 이 책 저 책 읽어본 결과 아주 잘 읽히는 책이 더 나은 것 같다. 페소아는 해설서까지 샀다만 아직은 어렵다. 그렇지만 [불안의 책]에는 이렇게 줄을 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문장들이 많다. 어떻게 하면 이런 재능을 가질 수 있을까.      


이른 저녁 식사를 해결하러 ‘쑥 11’에 가려고 했으나 공사를 하는 건지 망한 건지 아무튼 도대체 찾을 수가 없어서 비슷한 이름의 ‘11 cafe’에 왔다. 번듯한 호텔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태국 여자애와 데이트하는 서양남자들이 있다. 이 거리에 온통 그런 커플들이 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모르겠다. 이 거리에서는 그 자리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호객 행위를 하는 이들. 손님을 기다리며 관광객들에게 말을 거는 툭툭 기사들. 길에서 구걸하는 어린 아이. 아무도 사지 않는 물건이 가득한 좌판을 걸고 다니는 맹인. 그리고 어리고 귀여운 태국 여자와 하룻밤을 원하며 함께 술을 마시는 서양 남자들. 설마 스타벅스에도 있지는 않겠지. 나는 애써 그들을 무시하며 인도와 호주의 크리켓 경기에 굉장한 흥미를 가진 것처럼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이런 꿉꿉한 기분으로는 도저히 그냥 호텔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스피크이지 바에 찾아가기로 했다. 스피크이지 바는 간판이 없어 입구를 찾아 들어가야만 하는 아주 비밀스러운 종류의 바를 말한다. 술집인지 뭔지, 아니 그 안에 뭐가 있기는 한지 알 수도 없는 아주 은밀하고 유쾌한 공간이다. 약간의 귀여운 과정을 거쳐서 다른 바 안쪽에 숨겨진 ‘파인드더포토부스(FindThePhotoBooth)’ 에 들어왔다.      


이곳을 찾은 것이 이번 여행 중 최고의 선택이었다.      


나를 환영한 웨이터는 한국사 일타 강사 느낌의 훈남이다. 내 기억에 그의 이름은 ‘띤’이었다. 그의 추천대로 ‘방콕, 유브갓메일’과 ‘BTS 어쩌고’를 마셨다. 이 BTS는 아이돌 그룹명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방콕의 지상철도인 BTS에서 따왔다. 이 두 종류의 칵테일을 추천하기에 차례대로 둘 다 주문했다. 절대 하나만 마시지는 않는다. 이곳의 음악은 정말 힙이 터진다. 이제껏 갔던 바 중에 단연 독보적인 선곡과 분위기다. 물론 칵테일 가격은 결코 만만하지 않지만, 혼자 와서 술을 퍼마시고 있는 내게 그런 건 별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없다. 내가 술이 고픈 얼굴인 것을 눈치 챈 예쁜 직원이 더 마시겠냐고 해서 신용카드 되냐고 했더니 된단다. 나는 단걸 좋아하고 스트롱 바디를 원한다고 했더니 총총 물러나 바텐더에게 설명해줬다. 얘 장사 기가 막히게 잘 하네. 너 땜에 내가 마사지를 포기하고 매일 올 것 같다. 잠시 후 내게 배달된 칵테일은 알래스카. 엄청 세다. 보드카 베이스 인줄 알았는데 진이라고. 한 모금 마시고 진로 소주 마실 때의 바로 그 표정을 지으니 내 반응이 궁금한 바텐더가 굉장히 흐뭇해한다. 한 모금 더 마시고 양쪽 엄지를 모두 들어 올리며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알래스카를 마시며 호텔까지 기어가야겠다고 걱정하는데, 매니저가 다가와 혼자 온 것 같은데 우리 가게 분위기는 어떤지, 칵테일은 마음에 드는 맛인지 물어봤다. 그리고 괜찮다면 바에 앉아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길고 긴 밤의 시작이었다.      


이 멋진 바의 매니저는 마치 주성치 영화에서 비장하게 등장하지만 허망하게 발차기 한 번에 나가떨어지는 사람처럼 생겼다. 그의 이름은 ‘눔’.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태국어로 ‘젊음’을 뜻한다고 했다. 이름처럼 나와 같은 나이지만 훨씬 어려 보인다. 부럽다. 대학교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졸업하자마자 카오산로드에서 오랫동안 바텐더로 일했다고 한다. 어쩐지 영어를 너무 잘하더니만 전공자였어. 혼자 멀뚱히 있는 내게 말벗이 되어줘 고마운 마음에 한잔 산다고 했더니, 본인이 직접 화려한 동작으로 BTS를 만들어서 시음까지 하게 해줬다. 예전에는 1호점인 ‘파인드더라커룸(FindTheLockerRoom)’이라는 다른 바에서 일하다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기로 발령이 났다고. 그 옛날 <엽기적인 그녀>를 보고 한국 영화에 매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여자 사람 친구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는 걸 보고 뭐라고 한다고.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왜 이렇게 다들 드라마에 열광을 하는지.      


어여쁜 칵테일들

눔은 계속 바텐더와 웨이터들에게 끊임없이 지시 사항을 내렸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궁금해서 살짝 물어봤더니 바텐더가 알아야 할 여러 가지 사항이 정말 많다며, 아직 경험이 짧은 직원들을 교육하는 중이라고 알려줬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텐더는 항상 말을 열심히 센스있게 잘 해야 한다고 했다. 나 같은 손님들은 보통 그런 걸 기대하니까 내 기준에도 아주 중요하고 유용한 팁이다.     


자칫하면 네 발로 기어나갈 수 있는 곳이니 유의하자 

 

진짜 마지막으로 ‘올드 패션드(Old Fashioned)’를 시키고 같이 도란도란 떠들어준 다른 바텐더들한테도 한 잔씩 샀다. 호텔로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멋진 곳이지만 더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슬슬 일어나려는 찰나, 다른 지점에서 일한다는 바텐더들이 무더기로 놀러왔다. 그 중에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내 옆 자리에 앉은 남자애와 대화를 나눴다. 그 귀여운 아가의 이름은 맥스. 맥스가 내 다음 행선지를 듣고 타이페이에 있다는 분위기 좋은 바를 추천해줬다. 여기서 일하는 바텐더들을 가르쳐주신 사범님이 운영하는 곳이라며. 고맙다. 누나가 노구를 이끌고 폭우를 뚫고라도 꼭 갈게. 맥스는 아직 스물 셋 밖에 안 된 어린 총각이지만 바텐더 경력도 길고 성격도 쾌활한데다 영어도 능숙하여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는 멋진 성품을 지녔다. 한국 여자애들은 자기처럼 피부가 어두운 톤의 남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입을 삐죽 내밀어서 내가 조용히 대꾸해줬다.      


“노노 맥스야, 어느 나라 여자든지 조금 나이가 들면 말이다. 그런 건 사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다.”     


그러나 내말을 딱히 믿지는 않는 눈치였다. 사실 피부톤보다 중요한 것은 아주 많지만... 음 이건 그냥 나만의 생각으로 간직하기로 하자. 맥스의 팔 안쪽에 태국어로 멋진 문신이 새겨져 있기에 이게 무슨 뜻인지 물어봤다. 아버지의 생년월일이라고 했다. 그의 대답에 잠시 감동에 겨워 있었다. 그러나 이 찐한 감동은 금세 사라졌다. 알고 보니 맥스가 아버지의 생신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아버지가 갑자기 편찮으셔서 응급실에 갔는데, 맥스의 엄마가 입원 절차를 위해 전화로 아빠의 신상정보를 알려주셨다. 그런데 본인이 새긴 문신과 엄마가 말씀해주신 날짜가 다른 것이었다!!! 애초에 왜 잘못 알고 있었냐고 물어보니까 자기도 어찌 된 영문인지 잘 모른단다. 아 이 아가의 얘기를 들으며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이제 정말로 슬슬 일어날까 생각하는데, 눔이 마지막으로 회심의 일격이 들어간 샷을 만들어서 바텐더들과 그들의 친구들 무리와 그리고 저 멀리 한국에서 날아온 나까지 모두 건배를 했다. 이들은 일종의 재미난 습성이 있는데, 건배를 할 때 해피 버스데이 투 유-를 외친다. 아니 오늘 누구 생일이냐고 물어보니 그냥 본인들끼리 재밌어서 하는 거라고. 다 큰 어른들이 그러고 있는 걸 보니까 너무 귀여워서 또 술이 절로 들어갔다.      


“혼자 왔다고 심심해 할 필요 없어. 너도 여기서 친구가 생겼으니까.”     


눔이 말했다. 나도 이제 방콕에 친구가 생겼다. 갈지자로 걸으며 호텔로 돌아가는 길, 그들처럼 나도 미소를 띠고 있었다. 홀로 여행을 떠나 멀리 왔다는 것이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평생 잊지 못할 여행지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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