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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09. 2019

나는 그렇게까지 옹졸한 인간이 아니라고 믿었건만

6/14 Day. 4 

짐 톰슨 하우스를 다녀오다. 다니엘 타이거 펍에 앉아서 쓰다. 오후 7시.


우중충했던 어제 날씨와는 다르게 오늘은 쾌청했다. 나의 에너지도 덩달아 솟아오르는 흔치 않은 기분을 느껴서 호기롭게 짐 톰슨 하우스로 향했다. 이곳은 미국인이었던 집주인이 방콕에 정착해 실크 산업의 거물이 된 후 자신만의 성역을 완성한 결과다. 태국 전통 가옥 양식과 약간의 서양 취향을 더하여 아주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이 탄생했다. 관광객들도 적당히 있을 것 같고, 대중교통으로 무리 없이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 한낮임에도 큰 걱정없이 길을 나섰다. 호텔에서 근처 BTS역까지 도보로 5분이면 충분하니까 그 정도는 문제없이 걸을 수 있을 줄 알았지. 


나는 방콕의 날씨를 얕잡아 본 것이었다. 


더운 것보다도 숨이 차서 어지러웠다. 무시무시한 동남아시아의 기후. 생명수 같은 물을 마시며 나나역에 도착하여 별 어려움 없이 BTS를 타고 내셔널 스태디움 역에 도착했다. 10분 남짓 걸어가는 거리였는데 또다시 숨이 찰 정도로 더웠다. 온 몸으로 이 더위를 표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왜 나만 개처럼 헥헥대고 있지? 이 사람들은 어째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거지? 쾌적한 기후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조차 멀쩡했다. 유독 나만 더위에 약한 기분이었다. 나는 더위에도 추위에도 취약한 인간이다. 도대체가 이래서는 쓸모가 없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를 흩뿌리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감격했다. 

처음으로 관광 비슷한 걸 했다 

짐 톰슨 하우스는 원칙적으로 그룹으로만 입장하여 정해진 시간에 들어갈 수 있고 무엇보다 내부 촬영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그 덕분에 다들 온전히 투어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너무 더워서 모두 설렁설렁 걸어 다녔기에 속이 터졌던 나는 궁시렁대며 종종 걸음으로 가이드를 따라다녔다. 이럴 때는 또 성질이 급해진다. 이 더위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친절한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이리저리 눈을 굴려가며 구경을 했다. 투어가 진행되는 40분 동안 땀을 정말로 한 바가지는 흘린 듯 했다. 참고로 그 안에서는 물도 마실 수 없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고. 바로 옆에는 운하가 있기 때문에 때때로 모터 보트가 물길을 가르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고요하고도 이채로운 환경이다. 


짐 톰슨은 자신 만의 취향을 십분 반영하여 그럴 듯한 목조 주택을 짓고 떵떵거리며 살다가 홀연히 사라진 인물이다. 태국 실크 산업의 거물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 쿨한 양반이라 브루스 웨인이 생각났다. 그가 열심히 소장한 아름다운 불상과 도자기들을 보니, 더웠다.... 아름답고 멋진데 너무 더워. 투어를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박물관 측에서 제공해주는 툭툭을 타고 역으로 가서 바로 호텔로 돌아왔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선글라스를 끼고 걸었다. 린다 김 혹은 마오쩌둥 혹은 잠자리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한바탕 샤워와 빨래를 하고 어제 갔던 마사지샵에서 발 마사지를 받았다. 마사지사는 대단히 실력이 뛰어난 아줌마였다. 허나 묘하게 인상이 좋지 않다고 느꼈는데 이것은 사실로 드러난다.


펍에서 오아시스 노래를 틀어준다. 너무 멋지다. 이 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아 한 문장으로 남겨본다. ‘Some Might Say’ 굉장히 좋아하는 노래다.


엄청난 마사지를 받고 기분 좋게 일어났는데 리셉션이 있는 1층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려는 나를 붙잡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팁을 요구했다. 나는 팁에 박한 인간이 아니다. 이제까지 외국 여행 중에 수많은 마사지를 받고 팁을 주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엄마의 조기 교육 때문이었다. 하지만 50바트도 충분한 것 같아 50을 꺼내니 그녀는 100바트를 달라고 했다. 약간 벙쪘지만 그다지 큰  돈도 아니기에 줬다. 그러나 순식간에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다. 그녀가 팁을 요구하지 않았어도 나는 당연히 주었을 것이다. 100바트는 내게 큰돈이 아니지만, 50바트를 꺼낸 내게 더 요구하는 모습에 내 스스로가 너무 쪼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짜증이 났다. 다른 마사지사들은 내가 얼마를 주든 개의치 않고 받았다. 보통 마사지 후 그들이 내주는 차를 마시고 신발을 신으며 쓱- 팁을 건네곤 했다. 고마웠고 또 오겠다는 말과 함께. 그런데 왜 이 여자는 내가 팁도 제대로 주지 않는 찌질하고 인색한 구두쇠로 느끼게 만드는 거지? 내가 화가 난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구겨진 표정을 애써 풀면서 입구에서 주는 차를 마시고 있자니 어떤 서양 남자 손님이 그 마사지사를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 이 양반은 제가 좋아하는 직원이에요. 아주 아주 잘해요.”


당신한테도 사장이 안 보는데서 팁을 달라고 했나요?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마 서양 남자들은 팁이 후한 편이니(방콕은 유럽이나 북미 생활비의 반도 되지 않을 테니) 그녀는 먼저 요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처럼 별말 없이 얌전히 마사지를 받는 혼자 온 동양 여자는 아마 가장 쉬운 타겟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전히 글로벌 호구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면서 그녀에 대한 분노가 또다시 차올랐다. 아니 이 아줌마가 나를 뭘로 보고! 내가 아무리 개호구라고 해도 그렇지 말이야. 누가 팁 안 준 댔나?


나도 안다. 마사지사로 일하면서 대단한 에이스가 아닌 이상 엄청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오늘 점심으로 일식당에서 32,000원이라는 거금을 썼다. 그러니 3,700원이라는 팁은 사실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한국에서는 매일 커피 값으로 더 많은 돈을 썼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인색한 인간으로 느껴지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런데 왜 문장으로 옮겨놓고 보니 더욱 더 옹졸한 기분이 드는 거지? 


그녀가 손님에게 아무 어려움 없이 팁을 요구하게 된 것에 어느 누가 무슨 영향을 끼쳤을까 궁금해졌다. 가난한 가정환경, 일하지 않는 남편(기혼녀라는 전제하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 태어난 자식들(자식이 있다는 전제하여), 시급이 너무 짠 직장, 팁에 박한 관광객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다 합쳐진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빛을 처음 봤을 때 어딘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이런 갈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꾸 쓰다 보니 짜증나네. 내 표정까지 살벌해졌다. 이래저래 열 받아서 제일 비싼 맥주를 시켰다.  


태국 여행 카페에 들어가면 택시 기사랑 흥정하다가 맞은(!) 한국 여자들의 사건도 나온다. 그런 것에 비하면 내가 겪은 일은 아주 귀여운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여행을 온 사람들의 글 중에 태국 사람들이 돈을 밝혀서 짜증난다는 글을 보고 도대체 여행객들에게 무슨 돈을 어떻게 밝힌다는 건지 의아했는데 이런 종류의 일들이었다. 


새로 시킨 맥주는 수도사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수많은 종류 중에 가장 비싼 건데, 엄청 고소한 맛이 난다. 병을 보니 La Trappe Trappist 라고 써있네. 내 바로 뒤에 앉은 남자들은 사용하는 단어와 억양으로 봐서 영국에서 온 것 같다. 고급진 그들의 억양을 듣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허나 영국 남자들도 술이 들어가면 굉장히 시끄러워진다. 젠틀한 겉모습 뒤에 사실 야만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 성정이 없어서는 다른 나라에 식민지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역시 거문도를 침략 당했기 때문에 영국에 의해 피해를 입은 수백 개의 나라 중 하나였다. 깨알같이 부지런한 인간들 같으니. 내가 진짜 영국식 억양이 섹시해서 참는다(?). 


오늘 점심은 도착한 날 저녁에 갔던 일식당에서 해결했는데 알고 보니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곳이었다. 참치회덮밥이 먹고 싶어서 그리고 하이볼도 먹고 싶어서 시켰는데, 산토리가 아니고 짐 빔으로 시켜서 낮부터 센 술을 마구 들이켰다. 그 곳의 여직원이 내가 쉴 새 없이 술을 들이키는 것을 보고 놀랐을 것 같다. 저 중국 여자는 술을 참말로 잘 마시네! 감탄했을 거다. 이제는 중국인이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다들 중국어로 설명해준다. 젠장. 짐 톰슨 하우스에서만 카운터에서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봤다. 한국어로 인쇄된 간단한 안내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명이 너무 극존칭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조금 웃겼다. 


지금 당신은 짐 톰슨 하우스 안에 계십니다. 어떤 알고리즘으로 번역했는지는 몰라도 거스름돈은 500원 되세요,라는 어투에 세뇌당한 사람이 만든 프로그램일 가능성이 높다.

짐 톰슨 하우스에도 부처님이 계신다

‘Lyla’가 나온다. 노엘 형님은 진정 천재라고 본다. 혼자 여행을 와서 술을 마시며 오아시스 노래를 듣고 있자니 뜬금없이 노래방에 가고 싶다. 바로 건너편에 ‘코리아나’라는 이름의 노래방이 있어서는 아니다. 영향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고 보니 큰 소리로 동네가 떠나가라 노래를 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뒤에 있는 영국 남자들에게 너희들도 방콕에 와서 돈을 뜯겼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봤자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열심히 아이패드만 두드리다 터덜터덜 호텔로 돌아왔다. 첫 날의 용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만 것인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을 어려워하면 안될텐데. 벌써부터 실격당한 기분이다. 내 뒤에서 즐겁게 떠들던 그들이 잠시 대화가 멈추는 순간을 노렸으나, 정말로 단 한순간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영국 사람들이 이렇게도 수다쟁이들이었던가. 이탈리아 남자들이라면 그러려니 했을텐데. 


작가의 가장 필수적인 덕목은 바로 백업과 용기라고 했다. 난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더 노력하자. 


버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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