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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18. 2019

길을 잃었다

6/22 Day 4. 자정

미켈레 바에서 플럼 맥주를 마시며 쓰다. 오후 7시.      

마음이 급해서 일단 한 모금 마시고 찍었다


토르티야 칩에 치즈 올린 안주를 주문했는데 안주 내오는 사이에 맥주를 다 마실 거 같은 느낌이다. 여기도 나쁘지 않으나 아무래도 혼자 온 손님에게 그다지 아늑한 느낌은 아니기에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바에 들러볼 생각이다. 만약 거기도 사람이 많거나 하면 음 호텔에서 얌전히 짐이나 싸야지.     

  

이곳은 쾌적하고 예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 두 번째 술을 시키려면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서 주문한 맥주를 붙들고 조심조심 올라와야 한다는 거다. 예전 공장이나 공방을 개조한 것 같다. 직원들이 돌아다니면서 주문을 받거나 그런 게 아니다. 한마디로 취할 때까지는 술을 마실 수 없는 시스템인데, 대만 사람들이 술에 별로 관심이 없는 성품이 이런 데서 드러난다. 한국이었다면 진작 망했을 술집이다.      


근처에 괜찮은 바가 없나 찾다가 디화제 거리 근처에 사케 바를 찾아 들어갔다. 조이메이. 오늘 내게 친구가 되어준 바텐더들이다. 그 중 조이는 영어로 소통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타이베이까지 여행을 왔는지 어떤 특징을 가진 술을 좋아하는지 차근차근 물어본 후 좋아할 법한 사케를 추천해줘서 겁 없이 들이켰다. 망고를 넣은 가벼운 음료수(당연히 술이다)까지 마시고 있는데 가게 안으로 클레어가 들어왔다.      


아이폰 사진 강좌를 들어야겠다...


올해 스물다섯 살이라는 클레어는 낮에는 화학제품 회사의 영업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주말 밤에는 아주 멋진 드레스를 입고 신이 지역에 있는 클럽에 간다고 했다.    

 

그녀는 남자로 태어난 여성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 년을 살았기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거부감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너무 개인적인 부분이라 지금 성전환을 위한 과정 중에 있는지 어떤지 하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잠시 클레어가 담배를 피러 나간 사이에 조이에게 살짝 물어봤는데, 아직 수술 같은 본격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아주 예쁘게 화장을 할 뿐. 나보다 열 살은 어린 그녀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삶이 녹록치는 않겠다는 생각에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누가 누굴 동정하겠는가) 아직 살아야 할 날이 너무 많은 그 아이에게 그저 응원을 보내고 싶었다. 내게 너무나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던 조이와 메이에게 망고 소다를 한 잔 사면서 클레어에게도 맥주를 한 잔 샀다. 뭐가 좋겠냐는 말에 너가 사주는 거면 아무거나, 라고 대답해서 약간 서글펐다. 원하는 걸 말해도 되는데.    

 

빈속에 술 마시면 금방 취하니까 계속 먹고 있던 꼬치구이(바 바깥에서 꼬치구이를 파는 친구가 있어서 대 여섯 개는 사다 먹었다. 바의 사장님과 모종의 협약 관계를 맺은 듯 했다)를 몇 개 더 추가해서 같이 나눠먹었다. 눈화장을 기가 맥히게 한 클레어에게 정말 아이라인 예쁘게 잘 그렸다고, 나는 이제 눈도 상했고 무엇보다 귀찮아서 못한다고 하니 내가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냐는 팩트 폭격을 했다. 야 이...      


클레어야, 언니는 너무 덥고 땀이 미친 듯이 나서 이제 선크림과 립글로스만 바른단다. 너도 10년 후에 알게 될 것이야.       


한참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클럽에 간다는 그녀에게 나도 모르게 “몸 조심해”라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부디 어여쁘고 착한 클레어가 앞으로도 별일 없이 즐거운 삶을 보내기를. 펑리수 선물을 고민하는 내게 그녀가 추천해 준 ‘치아더’ 펑리수는 지인들에게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결정 장애를 가진 내게 다른 건 볼 것도 없으니 무조건 이걸 사라고 해줘서 고마웠다. 달디 단 과자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한국 와서 하루에 5개 씩 까먹었다.     


클레어가 떠난 후 조이의 강아지 블래키(대강 이해하건대 검둥이 수준의 네이밍인 듯 했다)와 놀았다. 오른 뒷다리가 없는 블래키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이전 주인에게 버림 받아 조이의 아버지가 입양한 강아지였다. 얼굴도 마음도 아리따운 조이의 아버지는 수의사라고 했다. 조이가 일하는 동안 블래키를 가게 안에 둘 수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이 귀여운 강아지에게 마음을 흠뻑 빼앗겼다. 너무너무너무너무 귀여워서 한참 붙잡고 예뻐했더니 나한테 뽀뽀를 하고 입질을 하고 결국은 마운팅(붕가붕가다)을 하고 난리였다. 조이는 블래키가 나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에 놀라는 눈치였다. 보통의 가게 손님들은 적당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한국어로 우리 집 개님, 봄이에게 하듯이 이뻐해주니까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조이는 한국에 갈 때 블래키를 데려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봤다. 블래키한테 물어봤더니 요놈은 그저 마냥 좋아하는 것 같았다.     


꺄하하하하하하핳 누나 술 좀 그만 처먹고 나랑 놀아주셈-


블래키가 다른 손님들에게 예쁨을 받는 사이 다른 바텐더 메이와 이야기할 시간이 나서 그녀에 대해 물어봤다. 그녀도 나처럼 오늘 이 바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바텐더로 일하는 첫 날이었다. 클레어도 처음 봤다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기에 당연히 친구인 줄 알았지.     


올해 마흔이 된 메이는 원래 패션 디자이너였다. 어느 순간 이 일이 너무 벅찰 뿐 아니라, 새로운 일에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바텐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만들어야겠다는 그녀의 다짐에 한국에 있는 우리 또래 여자들도 보통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멋진 내 친구들은 보통 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었다고. 그러나 나는 그런 삶을 바라지 않는다고도. 그렇게 계속 고민하면서 살고 있는 내 선배들도 많이 있다고 말했다. 사는 곳과 말하는 언어가 달라도 우리는 사실 같은 생각을 하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들과 함께 다른 사람이 아닌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언니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계속 고민해요? 저도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낯선 나라까지 왔어요. 내가 대체 뭘 원하는지 알고 싶어서요.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처키가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타이완의 배우이자 작가인 그는 꽤나 유명한 광고를 몇 편이나 찍은 남자였다.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대하자, 그는 한 달 째 일이 없다고 배우는 가난한 직업이라고 토로했다. 그래도 나는 그가 대단하게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내가 해야 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었다.      


나보다 ‘봉찬운’ 감독의 영화를 더 많이 본 그에게 김지운 감독의 초기작인 <조용한 가족>과 김윤석이 감독한 <미성년>과 그가 한국 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졌던 <타짜>와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인 <더 리틀 드러머 걸>을 꼭 보라고 추천했다. 그는 한국 영화를 추종했고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쓰레기라며(저의 의견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런 영화가 왜 한국에서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개봉 당시 주걸륜은 굉장히 핫했고 아직도 그 영화의 매력에 빠져서 단수이에 가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다고 말하자 혀를 끌끌 찼다. 아니 그렇게 멋진 남자애가 피아노까지 잘 치잖아. 인기가 없는 게 이상한 거 아냐? 그러거나 말거나 <살인의 추억>과 <박쥐>를 최고의 한국 영화로 꼽는다는 그에게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렇게 한국 영화를 잘 알고 또 많이 봤냐고 하니까 자기는 배우이기 때문에 시간이 아주 많다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사실 한국 영화만큼이나 그가 흠뻑 빠져 있는 대상은 바로 북한의 위대한 령도자인 김정은 국방위원장. 그와 내가 같은 나이라고 하니까 화들짝 놀랐다. 자기는 꼭 신혼여행으로 평양을 갈 거라고 했다. 그게 자신이 결혼을 못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왜 하필 영어 이름이 처키인지 물어봤더니 이게 본명이라고 했다. 처키,라는 말도 안 되는 본명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그는 가방에서 여권을 꺼냈다. 나는 이 도른자는 과연 뭔가 하고 미친 듯이 웃었다. 평상시에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태어나 처음 봤기 때문이다. 신분증을 잃어버려서 이러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아니란다. 허나 웃고 떠들다보니 끝내 왜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지 듣지 못했다.      


새벽 한시가 넘고 바는 문을 닫을 준비를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호텔로 가려는데 블래키가 슬슬 따라왔다. 큰길까지 같이 걷다가 위험할 것 같아 가게로 돌아가게 했다. 다행히 그 아이는 즐거운 발걸음으로 곧바로 다시 돌아갔다. 조이와 메이와 클레어와 처키, 그리고 블래키와 함께한 시간에 감사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나는 또 길을 잃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길을 찾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 밤 정신없이 서로 떠들던 어느 순간, 조이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어봤다.     


“안나, 너는 대만이 중국과는 다른 독립 국가라고 생각해?”      


“당연하지,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대만 출신 그 누구도 자신을 차이니즈라고 하지 않았어.

하나 같이 다 타이완 사람이라고 했거든. 그럼 그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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