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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19. 2019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6/23 Day. 5 

구글 맵이 나에게 빅엿을 주었다. 네 이놈들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미쓰코시 백화점 12층 카페에 앉아서 쓰다.    

  

타이베이 메인역 앞에는 미쓰코시 백화점이 있다. 명동 혹은 강남 신세계와 모든 것이 놀랍도록 비슷해서 잠시 혼란이 왔다. 생각해보니 명동 신세계가 일제시대의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이었다. 그 옛날 이상이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외쳤던 바로 그 건물이다.      


어제 심히 과음을 한 관계로 울렁이는 속을 애써 잠재우며 12시가 되기 전에 체크아웃을 했다. 우버를 불러 구글 맵에 표시된 호텔까지 오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는데 문제는 구글 맵에 호텔 주소가 잘못 입력되었다는 거다. 어떤 멍청한 놈이 데이터베이스를 잘못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나의 잘못도 우버 기사의 잘못도 호텔 측의 잘못도 아닌, 구글 맵을 만든 인간의 크나큰 잘못이다. 호텔 리뷰를 찬찬히 읽어보지 않은 내 잘못도 어느 정도 있다만(또 남 탓을 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내가 예약한 호텔은 1호점과 2호점이 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알 수 있듯이 1호점에 가야하는 나는 2호점에 덩그러니 내려졌다. 타이베이 전역에 부슬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와중에 거대한 캐리어를 끌고 다시 길을 찾아 떠났다. 너무 가까운 거리라 택시를 이용하기도 애매했고 이렇게 된 이상 오기가 생겨 비를 맞으면서 캐리어를 끌고 찾아 가겠다 다짐했다. 다행히 지도를 보며 더듬더듬 원래 가야할 호텔로 잘 찾아갔다. 걸어서 5분 거리였다. 등에 진 배낭 때문에 어깨가 아려왔다.     


체크인은 3시. 그동안 밥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오겠다 다짐하며 또 다시 길을 나섰다. 타이베이의 건물은 비를 피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 우산도 꺼내지 않았다. 너무 피곤하고 배가 고프고 가방은 무겁고 만사가 귀찮았다. 눈에 보이는 대로 가장 그럴 듯한 건물로 들어갔는데 거기가 바로 미쓰코시 백화점이었다. 식당가가 있는 12층에 올라와서 나베 돈카츠 같은 걸 먹으려고 호기롭게 들어갔는데 30분을 기다리란다. 약간 침울해져서 그나마 덜 붐벼 보이는 타이 레스토랑에 갔더니 40분을 기다리란다. 헛웃음이 나왔다.    

 

지하 식당가에서 베트남 쌀국수로 해장을 했다. 땀을 흘리며 국물을 먹고 나니 기운이 조금 생겨서 호텔 바로 앞에 있다는 로스터리 카페로 향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아예 들어갈 수 없었다. 혀를 내두르며 바로 옆의 스타벅스로 갔다.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가 없는 건 당연했고 참을 수 없는 냄새까지 났다. 누가 취두부를 먹는 모양이었다. 기가 막혀서 또 웃음이 나왔다. 다시 미쓰코시 12층으로 왔다. 다행히 여기 카페는 뻥 뚫린 전망을 자랑하는 길고 긴 테이블 좌석이 있었다. 막상 앉아보니 다리가 너무 불편해서 모퉁이의 테이블에 짐을 풀었다. 일기를 쓸 힘이 나지 않아 대만 음식에 대한 책을 한참 읽으며 저녁은 그럴 듯한 곳에서 맛있는 걸 먹고 싶다고 다짐했다.     


새로 묵게 된 호텔 주변에는 식당과 카페가 가득하다. 그 유명한 ‘타이거 슈거’가 바로 앞에 있을 정도다. 메인역과는 200미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어디 가고 싶으면 이지 카드를 챙겨 문을 나서면 된다. 하지만 이 번잡함은 견디기 힘들다. 지안 샨 호텔의 적막함이 그리워졌다. 오래된 동네 디화제의 고즈넉함이. 앞으로 여행에서 참고해야 할 상황이 많이 생겼다.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큰 도움을 준 경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절대로 이 모든 것에 굴복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한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만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시간은 흘러 드디어 체크인을 했다.     


방은 다섯 걸음 걸으면 끝날 정도로 아담했다. 그래도 화장실에는 창문이 있었으며 샤워실과 세면대와 변기가 독립되어 있어 그럴 듯 했다. 더블룸이라 침대는 컸다. 방콕에서부터 점점 방 크기가 작아진다. 방 크기가 작아질수록 도심 한가운데 가까워진다. 서울과 딱히 다르지 않다. 


불을 끄니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누가 시끄럽게만 하지 않는다면 죽은 듯이 잘 수 있는 환경이다. 시험해볼겸(?)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나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대만 음식의 향이 생각보다 너무 강력하여 한참 고민하다가 일식집으로 갔다. 아까 못 먹은 나베가 계속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가 부슬부슬 오다가 미친 듯이 오다가 다시 부슬부슬 오다가의 반복이었다. 이대로 일주일 동안 비가 그치지 않으면 임가 화원이고 뭐고 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기운이 조금 빠졌다. 


기운이 빠지는 것도 잠시 주문한 나베가 나왔다. 여러 고기와 튀김이 적당하게 들어간 메뉴였다. 연어 사시미도 조금 시켰다. 무엇보다 방금 지은 밥인지 너무 고슬고슬하여 흥분해서 먹었다. 일평생 손에 대지도 않던 시금치 무침도 먹었다. 이제까지 이게 맛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웬걸 엄청 맛있었다. 엄마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시금치 무침은 그닥 맛있게 하시지 못했나보다.... 실컷 다 먹고 보니 장어 덮밥을 먹었어야 했나 잠시 후회했다.     


순식간에 저녁 식사를 끝내고 근처 스타벅스에 녹차 프라푸치노를 먹으러 갔다. 이놈의 이지 카드를 사용하고야 말겠다는 생각 뿐. 직원에게 이거 쓸 수 있냐고 하니까 물론이죵! 경쾌하게 대답해줘서 기뻤다. 스타벅스 모든 지점에서 다 쓸 수 있는 건지 어쩐 건지 몰라서 약간 걱정했는데 아마 다 되는 듯하다. 스타벅스는 뭐랄까, 약간 독재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어느 지점에서는 되고 다른 데는 안 되고 이런 건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프라푸치노를 마시며 카톡으로 리타언니와 [유미의 세포들]의 바비를 욕했다. 내가 여행을 떠나있는 사이 언니는 프랑스에서 고야드 백이 사고 싶어 유럽 여행을 가고 싶다는 대단한 발상을 했다(그러나 언니는 아직도 그 가방을 사지 않았고 앞으로도 절대 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언니, 그냥 서울에서 백을 사는 게 더 싸게 먹힐 텐데요. 냉정한 냔이라는 대답이 와서 또 빵 터졌다. 오사카 몽슈슈의 리플레이였다. 가로수길에서는 너무 비싸서 맨날 지나다니면서도 사먹지 못했다는 언니. 오사카의 작은 호텔방 침대에 앉아 그동안 이게 꼭 먹고 싶었다고 입을 오물거리며 아침부터 커피와 함께 행복하게 먹는 언니에게, 아니 여기 여행 올 돈이면 이거 수십 개는 사먹을 수 있을 텐데요, 라고 대답했다. 자비 없는 팩트 폭격에 언니는 당황한 눈치였다. 나 역시 때때로 느끼지만 난 은근 냉정한 구석이 있다. 너도 그 때 같이 잘만 먹어놓고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말이냐는 말에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나는 냉정하면서도 시선 분산에도 소질이 있다. 


타이베이 도심의 건물들은 대체로 아주 거대하고 빌딩 1층의 모든 면에 빙 둘러서 식당과 카페 등이 있다. 사이사이에 편의점과 왓슨스가 있고. 비를 피할 수 있는 구조라 잘하면 하루 종일 우산 없이도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실 수 있다.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편의다. 하지만 그런 편의는 오늘로 끝내고 싶다. 이번 주 내내 비가 온다면 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일단 폭스 무비 채널에서 해주는 <어벤저스 2>를 보고 난 뒤에 고민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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