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4 Day 6.
세븐 일레븐에서 밀크티와 타이완 맥주와 푸딩을 사온 후 쓰다.
비까지 내리는 월요일이라 딱히 갈 만한 곳이 없어 월요일에 휴관을 하지 않는 중정기념당을 다녀왔다. 볕도 들지 않는 방에서 오전 내내 달게 잤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대만 음식 역시 중국풍의 강한 향이 나서 면 종류 같은 건 시도해보고 싶지 않았다. 고수는 어려움 없이 잘 먹지만 대만 음식 특유의 쿰쿰한 냄새에 비위가 상해버렸다. 삭힌 음식의 엄청난 향이 갑자기 나를 공격했다. 그래서 오늘 낮에도 근처 일식당에서 돈부리 같은 튀김을 잔뜩 먹었다. 역시 흰 쌀밥과 된장국이 최고.
비 온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거듭 말하지만 지금 호텔은 딱히 오래 있고 싶은 환경이 아니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정말 스무 걸음 정도 걸으니 타이베이 메인 역으로 향하는 출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다들 위치 하나는 기가 막힌다고 극찬을 했는데 그게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중정기념당에 도착하니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허나 습도는 90프로 였다. 온 주변에서 가습기 바람이 불어오는 듯 했다. 피부가 촉촉해졌다. 얼굴에서 반짝 반짝 윤이 났다. 선크림이 줄줄 녹고 있었다. 얼굴이 따갑다못해 마구 가려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쾌한 걸음으로 중정기념당 광장으로 향했다. 세계 각지의 언어가 들렸다. 조심조심 89개에 달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 거대한 동상을 봤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아 금방 내려왔다. 양 옆으로 작은 규모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연못에 아치 형의 다리까지 있는 예쁜 공간이었다.
정원을 구경하며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목적지인 '행천궁'으로 향했다. 지난주에 갔던 용산사의 화려함과 그 곳을 찾은 대만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이 마음에 남아 이번에는 관운장을 신으로 모셨다는 곳에 가보고 싶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관우가 재물을 주관하는 신이기에 부귀영화를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올리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장 친한 언니들과 오빠들의 부귀영화와 무엇보다 나의 세속적인 영달을 빌었다. 돈 많이 벌어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십시오, 관운장님. 삼국지에서 가장 쿨하셨으니까 제가 믿어보렵니다.
간절한 표정으로 기도를 올리고 나오는데 습도가 너무 높아서 또 어지러웠다. 역 근처 세븐에 들어가 아주 달달한 밀크티를 사서 당 보충을 한 뒤 슬슬 돌아왔다. 호텔 바로 앞에 괜찮은 로스터리 카페가 있다고 하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방금 전에 보충한 당은 이미 땀으로 빠져나갔다. 그나마 오늘 마신 커피가 제일 낫다. 스벅마저도 라떼가 밍숭맹숭하여 은근 실망했는데. 윌벡 카페(아마도 대만에서 새롭게 급부상한 프랜차이즈 브랜드인 듯)에 근처 회사에 다닐 법한 아저씨들이 많았다. 가격도 엄청 싸고(한국으로 치면 1600원) 매장에서 직접 로스팅을 해서 그런지 커피가 부드러웠다. 조금 더 진해도 좋을 텐데. 이 나라는 커피를 진하게 마시는 풍습이 아닌가 보다. 필요한 카페인은 차에서 다 얻나? 사람들이 졸려 미칠 지경이 될 때까지 일을 하니 않는 건가?
잠시 노닥거리고 난 후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24시간 한다는 평범하지만 괜찮은 대만식 식당에 갈 것인지 팀호완에서 예전에 먹었던 그 메뉴들을 다시 먹을 것인지 고민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호텔에서 5분 거리의 덴수이러우에 갔다. 그 식당은 걸어갈 수 없고 팀호완은 온통 한국 사람들 밖에 없다고 하기에 약간 민망해서 갈 수 없었다. 덴수이러우에서 샤오롱빠오를 한 통 먹고 무 케이크?같은 걸 먹었는데 굉장히 맛있었다. 맥주도 한 잔 했겠다 바로 옆에 공원도 있겠다 산책을 해볼까 했는데 무시무시한 존재가 있다고 하여 마음을 접었다. 그것은 바로 대만에 서식한다는 엄청난 수준의 모기. 한국의 모기와 차원이 다른 사악함을 보여준다는 모기, ‘샤오헤이원’이었다. 물리고 나서 2,3일이 지나서야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듯 부어오르고 물집이 잡히며 극한의 가려움과 고통을 선사한다는 모기였다. 그러니 산과 숲 및 공원 등지에 갈 때는 절대적으로 주의를 요한다고 했다. 이런 종류의 벌레가 그렇듯 대만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외국인만 집중적으로 공격한다고 했다. 귀신같이 어떻게 알고.
호텔 엘리베이터에 벌레에 대한 경고문이 붙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 놈이었다. 나는 그동안 모기 기피제를 뿌리지 않고 잘만 다녔다. 너무 더워서 벌레가 있을 법한 장소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모기를 피한 거였다. 검색해봤더니 모기에 수십 방을 물리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열흘 넘게 고생한 사람도 있고 1년 동안 흉터가 없어지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잠복기간이 있다는 게 이 생명체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나는 3주 후에 베를린에 가야한다. 조용히 임가화원 방문을 계획에서 지웠다. 특히 이곳에 모기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잔뜩 겁을 먹고 대만에서 최고 좋다는 모기 기피제를 사러 왓슨스로 향했다. 이거 사는 김에 친구들에게 줄 퍼펙트 휩도 살 생각이었다. 정말 그것만 사려고 했는데 근데... 갑자기 샴푸도 사야하고 토너도 사야 할 것 같아 눈에 띈 제품으로 다 사버렸다. 한국에 비하면 정말 싼 가격이었다. 왜 다들 눈이 뒤집혀서 화장품을 쓸어담는지 알겠더군.
뿌듯한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와 여행 일정을 수정했다. 딱히 많이 달라진 건 없었다. 어차피 부지런히 다닐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호텔 바로 앞 세븐일레븐에서 가장 유명한 화장품 밀크티 두 병과 타이거 맥주와 푸딩을 사왔다. 전부 해서 3,700원이었다. 정말 한국은 물가가 미쳤구나. 이게 말이 되는 가격인가.
아주 고요했던 디안 샨 호텔 근처와는 다르게 이 거리에는 노숙자가 굉장히 많았고 편의점 직원이 전혀 웃지 않았다. 타이베이에서 가장 붐비고 관광객이 많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내일은 세계 각국의 모든 음식을 다 만나 볼 수 있다는 대단한 곳에 가보려고 한다. 바로 타이베이 메인역의 푸드 코트다. 모로코 레스토랑이 있다면 진심으로 화들짝 놀래주겠다. 생각해보니 단 한 번도 모로코의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네.
타이베이에서의 여섯 번째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