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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Oct 13. 2019

어른을 울리고 싶다면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5

가파른 언덕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일방통행이다.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도로는 목동의 오목교 근처 일방통행로보다 더 악명높다. 분명히 내가 가야할 건물이 바로 저기 보이는데 갈 수 없다. 일방통행 때문에 같은 골목을 몇 번이나 빙빙 돌아야 했던 이들을 너무 많이 봤다. 다 큰 어른을 울리고 싶다면 스틱 자동차 운전석에 앉혀서 이 도시 한가운데에 던져 놓으면 된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를 렌트해서 다닐 예정이라는 여행자들을 보면 일단 뜯어 말린다. 운전이 매우 능숙하지 않으면 그곳은 정말로 위험한 곳입니다. 그냥 버스를 타세요. 노선이 아주 정직하게 잘 되어 있답니다. 나 같은 길치에 방향치도 길을 잃어버릴 수 없도록 이 도시는 격자 무늬 모양으로 가지런하게 만들어졌고, 수많은 노선의 버스가 열심히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는 저상 버스도 이 때 처음 봤고 실제로 이 자리를 이용하는 장애인들도 많이 봤다. 나는 단 한번도 서울에서 휠체어를 태운 버스를 본 적이 없다. 2019년인 지금까지도. 


버스. 미국의 버스는 재밌는 특성이 있다. 나는 평소에 실없는 소리로 친구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취미가 있다. 나에게 잠시 배웠던 초등생들에게 비행기 탈 때 여권을 교통 카드처럼 찍어야 한다고 뻥을 쳤는데, 내가 너무 뻔뻔하게 말해서 간혹 속는 어린 양들도 있었다. 


“비행기 타러 들어갈 때 이렇게 여권을 삑-하고 찍어야 하는 거야. 그래서 전자 여권으로 다 바꾼 거라니까? 왜 안 믿지?” 


이런 나의 습성 탓에 친한 친구들은 내가 눈웃음을 치며 하는 이야기를 잘 믿지 않는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라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 태어나 처음으로 미국 출장 및 여행을 가는 친구에게 미국 버스의 재미난 점을 알려줬다. 


“우리나라는 하차할 때 벨을 누르잖아? 거기는 버스 창가 위쪽에 길게 수평으로 줄이 달려 있어. 그걸 이렇게 밑으로 잡아 댕기면 하차한다는 뜻이야. 내릴 때 놓치지 말고 힘껏 잡아 댕겨야 해. 안 그럼 안 세우고 지나갈 수도 있거든.” 


“야 너 또 무슨 헛소리를 해서 나를 속이려는 거야? 뭔 줄이 있다고? 웃기고 있네.” 


친구는 끝까지 믿지 않았다. 아니 이건 진짠데… 약간 억울했지만 나는 아직도 친구들에게 수시로 뻥을 치고 있다. 


마이클 베이가 자신의 영화에서 인장처럼 보여주는 장면은 바로 모든 갈등이 해소된 시점에 하늘을 찢을 듯이 날아가는 전투기들의 비행 장면이다. 뭐 하다가 이제서야 도착했는지 궁금하지만 그건 딱히 중요하지 않다. 가을에 이 곳을 방문할 수 있다면 눈 앞에서 거대한 전투기들이 고층 건물 옆을 날아다니는 근사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바로 ‘플릿 위크(Fleet Week)’에서. 한 때 전투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했던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매년 10월 초, 미해군이 샌프란시스코 항에 일주일간 정박하며 시민들을 위해 여러 이벤트를 진행한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미해군 소속 곡예비행팀인 ‘블루 앤젤스’의 에어쇼와 실제 군함에 탑승하여 구경할 수 있는 투어이다. 그 때 처음으로 이지스함과 F 뭐시기 전투기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봤다. 더불어 그 앞을 완전무장한 채 지키고 있는 내 또래의 어린 군인들도. 서로가 서로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진귀하고도 씁쓸한 체험이었다. 전투기는 생각보다 굉장히 크고 또 굉장히 시끄러우니 가뜩이나 사람도 많고 정신없는 부둣가에서 혼이 나가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관광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나는 꼭 가을에 방문하라고 한다. ‘플릿 위크’ 뿐 아니라 매 주말마다 열리는 다채로운 축제 때문이다. 한참 전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2006년 가을에는 주로 재즈 음악 페스티벌이 도시 곳곳에서 열렸다. 축제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은 근처의 카페와 펍으로 쳐들어가서 하루 종일 술을 들이붓고 춤을 추며 낯선 이들과 친구가 된다. 이 분위기가 절정에 달아오르면 옆 사람과 대화조차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워진다. 번잡한 곳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나도 쉴 새 없이 웃고 떠들며 내게 허락된 시간을 만끽했다. 거의 매일 같이 비가 내렸던 우울한 봄과 뜨거운 햇빛으로 피곤한 여름과 달리, 샌프란시스코의 청명하고 선선한 가을은 다양한 축제로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워진다.  


뉴욕이나 L.A가 너무 부유해서 종종 시시하게 느껴지는 반면, 샌프란시스코는 더 부유한데도 도시 전체를 감도는 독특한 외로움이 있다. 때때로 이 도시는 자욱한 안개로 사람들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일년 남짓한 시간 동안 참을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었다. 안개가 걷혀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는 날에는 나만이 알고 있는 장소로 걸어가곤 했다. 앞서 말한 흥겨운 축제가 주로 열리는 곳은 ‘필모어 스트리트(Filmore Street)’ 일대이다. 그런데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바다를 향해 하염없이 걸어 올라가면 언덕 위에 조용한 주택가들이 나오고 어느 순간 눈 앞에 바다가 펼쳐진다. 관광객들은 오지 않는 한적한 언덕길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저 바다 너머에 있는 우리 동네와 가족들과 친구들을 생각했다. 한참 그렇게 넋을 놓고 있다가 집으로 혹은 일터로 돌아가면 다시 기운내서 일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십년도 더 지난 지금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그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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