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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Apr 09. 20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는 힘들다

Lucy Huber의 저널을 읽고

흥미로운 저널 하나를 읽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육아의 긍정적인 면에 대해 이야기하면 좋겠다("I Wish More People Talked about the Good Parts of Parenting" - Lucy Huber, 2022. 2. 17, Time)"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필자 루시는, 육아가 그리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감춰진 진실을 말하고 있다. 자신이 임신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해주던 육아의 고충 - 잠을 설치게 될 것, 머리카락이 빠질 것, 아이가 걸음마를 할 때까지, 아니 십 대가 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등등 - 에 대한 이야기들이 엄마가 된 후의 기쁨에 누가 되었다고 한다. 그 누구도 육아의 좋은 면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마 됨, 즉 모성이 신성시되던 '80년대에 임신했던 자신의 어머니는 아무도 육아가 힘들다는 말을 해주지 않아서 몰랐다가, 실제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겪었던 어려움에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에는 산후 우울증이나 아이들이 일으키는 말썽들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솔직하게 말하기 시작했고, 아빠나 엄마의 모습도 고정관념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다소 과한 나머지 이제는 세상이 육아의 고충만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필자는, 육아의 긍정적인 면도 계속 담론화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출산하여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필자에게 어려움도 많았지만 좋은 시간도 많았다고 한다. 아기가 순하거나 자신이 완벽한 부모여서가 아니라,  엄마가 되기 전에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경험이었다고 한다.

필자는 말한다. '가끔 아이가 잠들고 나면 아이와 함께 있을 때의 느낌을 되새겨 본다. 아이가 덤프트럭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사진을 보면 엔도르핀이 돈다.'

우리는 좋은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육아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평범한 일상 속이기 때문에 더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엄마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다고 한다.

필자는 말한다. '육아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느낌을 준다: 아이가 노래를 듣고 울음을 멈출 때, 아이를 안아주거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줄 때, 석양이 물든 공원에서 아이가 공차기를 할 때 - 온 세상이 오직 아이와 나만의 것인 것 같은 순간이다.'

그리고 필자는 만약 친구가 출산을 앞두고 있다면 정말 행복한 날들이 올 거라고, 너무 행복해서 터질 것 같은 순간이 올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덧붙인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정작 그 순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느껴질 때가 있다. 죽을 만큼 힘들었던 순간도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무용담으로 바뀌곤 한다. 우리에겐 과거를 미화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앨범을 정리하다 아이들의 어릴 적 모습을 사진으로 볼 때면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피어나곤 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긴 그 무렵의 구체적인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20대의 나, 30대의 나, 아이들의 젖먹이 시절과 아장아장 걸음마 시절의 나... 아이들의 모습이 아닌 내 모습이 떠오른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나 자신을 붙잡느라 애쓰던 시절의 나...


육아는 힘들다. 누가 뭐래도 힘들다.

출산 후 찾아오는 산후 우울증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시작되는 육아의 고달픔은 영혼까지 탈탈 털릴 정도로 위력적이다.

생존에 필요한 반사 반응만 갖추고 태어난 존재를 처음부터 오롯이 책임지고 키워내야 한다는 건,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으로서는 때로 자기 자신을 초월해야 할 일이다. 말로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존재가 울면 왜 우는지, 떼를 쓰면 왜 화가 난 건지, 밤에 쉽게 잠들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건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알아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고심하며 키웠는데, 사춘기에 돌입한 아이들이 눈을 굴리며 말대꾸를 하기 시작하면 살아온 인생이 반쯤은 날아간 기분이 든다. 성인기에 돌입하면 자기들 사생활이라며 사전에 질문을 아예 차단당하기도 한다. 그럴 땐 머릿속에서 나머지 인생의 반도 마저 날아간다.

그나마 육아와 일을 조금이라도 병행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육아만 했다면, 아이들이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됐을 때 엄습한 허탈감을 감당할 자신이 나에겐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교육 관련 TV 다큐멘터리에서 한 엄마가 하는 말을 듣고 놀라웠던 적이 있다. "... 쟤(자신의 아이)가 나고 내가 쟨데요. 우린 한 몸이잖아요. 그러니까 뭐든 뒷받침해줘야죠..."

아이를 사랑한다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아이와 나 사이에도 적당한 심리적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는 길이다. 아이가 내 몸에서 나왔다고 나와 한 몸은 아닌 것이며, 더욱이 내 소유물도 아니다.

양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이를 내게서 떠나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양육의 목적을 늘 기억하고 아이와의 심리적 거리두기를 연습하면 육아의 중압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이 저널을 읽으며, 육아의 긍정적인 면을 잊지 않고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필자의 노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두 아이가 다 자라 품을 떠나간 지금, 돌이켜 보면 육아의 모든 순간이 아쉽고 그립기만 하다. 

이것도 지나고 나서 드는 생각이긴 하지만, 육아의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던 것 같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 순간이 영원할 것만 같았고, 다섯 살짜리 옷을 고르다가도 나는 언제 열 살짜리 옷을 골라보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 자신을 좀 더 보살펴 주고 싶다.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가 내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지 않도록 잘 관리할 것이다. 가끔은 주변의 도움을 얻어 잘 먹고, 잠도 푹 잘 것이다. 내가 건강하고 편안해야 아이들을 잘 보살필 수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순간을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보낼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는 오로지 아이들에게만 집중할 것이다. 사랑한다는 표현도 더 많이 할 것이다.


지나고 보면 놓친 것들이 눈에 띄곤 한다.


"I Wish More People Talked about the Good Parts of Parenting" - Lucy Huber, 2022. 2. 17, Time

https://time.com/6148022/parenting-good-parts-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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