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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an 05. 2024

친구 만들기 4

몇 달 후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도, 집을 떠나 몇 시간씩 낯선 곳에 있어야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학교가 아주 싫은 건 아니었다. 학교에 가면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느라 심심하지 않았다. 키가 작고 마른 편이었던 나는 줄을 설 때도, 교실 책상에 앉을 때도, 언제나 맨 앞이었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재미있었다. 선생님께 칭찬을 들은 날은 하늘을 날 듯 기분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언제나처럼 분이와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나는 그날이 분이가 나를 찾아온 마지막 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내가 오지 않더라도 잘 지내야 해." 분이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이렇게 말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이제 안 올 거야?" 갑자기 먹구름 같은 게 가슴에 뭉게뭉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볼 수 없더라도 너와 헤어지는 건 아냐. 이제부터 나는 네 마음 안에 살게 될 거야."

분이의 말 때문이었는지 나는 슬프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마지막이라거나 영영 헤어지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마음 안에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분이의 말을 믿기로 했다.

다음 날부터 정말 분이는 오지 않았다. 달빛 어린 벽지는 마치 조명만 남은 빈 무대 같았다.

그러나 나는 쓸쓸하지 않았다. 분이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분이와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말을 걸면 분이는 내게 대답해 주곤 했으니까.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분이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대신 학교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숙제도 시험도 셀 수 없이 늘어났다. 분이도 별로 말이 없었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지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분이와 놀던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고등학교 때 보육원으로 봉사활동을 갔던 게,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보살피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가 됐다. 특별한 사명감이나 이타적인 마음이라기보다, 아이들과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라는 게 정직한 이유다.

교사로 일하게 된 유치원은 교생실습을 했던 곳이기도 해서 무척 친근했다. 출근길 버스 창 밖으로 모교 캠퍼스가 보일 때마다, 학습자료가 잔뜩 든 가방을 들고 동동거리며 버스를 타고 교생실습을 다니던 때가 생각나 혼자 슬며시 웃기도 했다. 훈련은 혹독하고 나는 서툴기 짝이 없었지만, 실습 동기생들과 동료애를 나누며 무사히 교생실습을 마친 나 자신이 스스로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습이 끝나고 한 달 후 인사하러 찾아간 유치원, 입고 간 투피스 솔기가 뜯어질 정도로 껴안고 매달리는 아이들의 변함없는 사랑에 행복하기도 했다. 추억이 어린 곳에서 교사로 일하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우리 유치원은 매년 5월 둘째 주에 1박 2일의 교사수련회가 있었다. 선생님들끼리 친목도 다지고 학습 프로그램에 대해 아이디어도 나누는 자리였다. 교사가 되고 처음으로 참석한 수련회에서 도자기 머그컵에 그림을 그려 넣어 자신의 '마음컵'을 만드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어릴 때의 내 얼굴을 그려보기로 했다. 아이들과 생활하며 내 어릴 때가 생각나곤 했기 때문이다.

조그맣고 동그란 눈, 짧고 곱슬곱슬한 머리, 장난기 머금은 미소... 그림을 다 그렸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마음에 담긴 걸 표현해 보자는 생각에 무심코 그린 건 내 얼굴이 아니라, 어린 시절 내가 벽지에 그려 넣었던 분이의 얼굴이었다.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겨 분이와 이야기하지 않고 살아오는 동안에도 분이는 여전히 내 마음 안에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잊고 지내던 분이를 다시 떠올리게 된 후로 나는 가끔 우리 반 아이들의 모습에서도 분이를 보곤 했다. 쉬지 않고 재잘대는 작은 새 같은 아이들, 호기심에 눈동자를 반짝거리는 아이들, 내게 달려와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아이들,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순간순간에 분이의 모습이 나뉘어 숨어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그맘때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는 동안에도 가끔 분이가 생각나곤 했다. 분이는 옛날처럼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분이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분이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분이도 나처럼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어갈까, 아니면 내가 그려줬던 모습 그대로일까. 분이를 처음 보았을 때 빙글빙글 춤을 추던 모습이 생각났다.


거울을 보았다. 무심코 바라본 내 얼굴 위로 분이의 얼굴이 겹쳤다. 분이의 얼굴은 옛날 그대로인데 중년이 된 내 얼굴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 분이는 바로 나였다는 것을. 오랜 세월을 지나 이제 비로소 분이에게 돌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분이는 미래의 내가 어린 나에게 보냈던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거울 속 분이가 옛날 그 어느 날처럼 말했다. "안녕!"

내가 말했다. "안녕! 보고 싶었어."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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