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에서 지내며 몸도 마음도 회복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내 방 문 앞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얀 바탕에 푸르스름한 물결무늬가 있던 벽지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갈색 들꽃 그림이 잔잔한 새 벽지가 사방에 둘려 있었다. 내가 그린 그림들도, 보고 싶던 분홍원피스 소녀도, 모두 벽지와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방으로 들어선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새 벽지 여기저기를 손으로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만져보아도 분홍원피스 소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 밤은 온통 분홍원피스 소녀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아프던 날 밤 소녀가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정말 소녀가 춤을 추었던 건지, 고열로 어지러워 소녀가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소녀를 다시 볼 수조차 없으니 가슴이 답답했다.
그때였다. 생각에 잠겨 응시하던 벽지의 꽃 그림 하나가 슬그머니 풀려 머리카락처럼 흩어지더니, 이내 다시 모여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혹시 또 열이 나는 건지 나는 이마를 짚어보았다. 뜨겁지 않았다. 헛것이 보이나 싶어 눈을 비볐다 다시 떠보았다. 어느새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내가 벽지에 그려 넣었던 소녀가 나타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소녀는 조그맣고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녕!"
그 아이의 목소리를 정말 들은 건지 아니면 들었다고 생각한 건지 나는 지금도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림이 움직이고 말을 하다니. 내가 그린 그림이 내게 말을 걸다니.
만약 어른이 된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나는 소리를 치거나 기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땐 놀라긴 했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좀 이상하긴 했어도 금세 익숙해졌던 것 같다. 그림책을 보듯 만화영화를 보듯, 그렇게 말이다.
한 가지, 낡은 벽지와 함께 버려졌을 내 그림이 어떻게 새 벽지를 통해 내게 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나는 그 후 한 번도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아마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보다는 반갑고 신기한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안녕!"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끌어내 인사를 건네보았다. 소녀는 씩 웃더니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더 어색해지려는 기분을 누르며 말했다. "넌 이름이 뭐야?"
궁금한 거 투성이었지만 우선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던져본 질문이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는 소녀가 말했다. "난 아직 이름이 없어. 네가 지어줄래?"
아프던 날 밤처럼 창문 틈으로 새어든 달빛이 소녀가 입고 있는 분홍빛 원피스를 비추고 있었다. 달빛에 버무려진 분홍빛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색 같았다. 내가 칠한 색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 색깔의 이름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분홍의 '분' 자를 따서 '분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분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분이와 이야기했던 것 같다. 눈을 뜨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분이와 이야기하다 그만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벽지와 이불까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어디에도 분이는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꾼 거라 생각하기엔 분이와 나눈 이야기들이 너무 생생했다. 나는 분이가 또 와주기를 기다렸다.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날 밤 분이는 다시 왔다. 반가운 마음에 내 목소리가 커졌는지 엄마가 내 방 문을 열고는 "아직 안 자?"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엄마가 분이를 발견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벽지 무늬 옆에 가만히 있는 분이를 다행히 엄마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뭔가 나만의 비밀이 생긴 것 같아 짜릿했다.
"걱정 마. 어른들은 나를 볼 수 없을 거야. 난 친구 눈에만 보이거든." 분이의 말에 안심이 되었다.
분이가 들려준 이야기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분이가 사는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 그곳엔 분이처럼 친구들의 그림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럼, 너도 내가 그려줘서 나한테 온 거야?" 내가 묻자, 분이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분이는 매일 밤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자려고 누우면 어느새 나타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내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듯 웃어주기도 했다. 잠들기 전 분이와 보내는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분이의 옷처럼 고운 분홍빛 생각들이 분이와 함께 있으면 뭉게뭉게 피어났다.
더 이상 슬픈 생각이 들지 않았고 아무것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 시절 내가 느꼈던 이름 모를 감정은 바로 행복감이었다.
그러나 마냥 달콤하기만 하던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 마지막 이야기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