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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Dec 22. 2023

친구 만들기 2

어느 날 그림책을 보던 나는 문득 벽에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어른들을 일일이 쫓아다닐 필요도 없고, 엄마가 청소할 때 내 그림이 휴지통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너무 훌륭한 아이디어라 스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내 방 벽지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케치북이나 종이에 그릴 때랑은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뭐든 다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신이 났다. 머릿속에 펼쳐지는 세상을 벽에 옮기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크레파스를 쥔 손이 이젠 내 명령 없이도 혼자 어디론가 막 날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찌르듯 들려왔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엄마한테 탄식 섞인 꾸중을 한참이나 들은 것도 모자라, 저녁엔 아빠한테까지 야단을 맞았다. 잘못했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나는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넓디넓은 벽에 그림 좀 그린 게 왜 엄마를 힘들게 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풀이 죽어 내 방에 들어온 나는 이부자리 위에 벌러덩 누웠다. 아까 그려놓은 벽지의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짧은 머리 곱슬곱슬한 여자아이가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신나게 그려 넣었던 그 아이의 미소가 갑자기 보기 싫어졌다. 나는 등을 홱 돌렸다.

눈을 감고 아무리 잠을 청해 보아도 헛수고였다. 밖이 밝은지 캄캄한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벌써 해가 진지 오랜 창으로 달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마주 보이는 벽이 마치 조명을 받은 듯 희부얬다.

그때였다. 눈앞에 희미하게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동물 같기도 하고 인형 같기도 한 그 형체는 점점 또렷해졌다. 얼어붙은 듯 꼼짝 못 하고 응시하던 나는 그 형체가 다름 아닌 바로 내가 벽지에 그렸던 여자아이란 걸 알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내가 그린 대로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플라멩코나 발레의 한 동작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놀랍고 무서워야 할 순간에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빙글빙글 도는 소녀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게 안타까웠지만, 나는 그대로 잠에 빠지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건 하얀 천장이었다. 곧이어 병원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옆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지만, 여전히 너무 졸렸던 나는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날 밤 내가 너무 오래 자는 것 같아 들여다봤던 부모님이 열에 들떠 온몸을 달달 떨며 잠꼬대하는 나를 발견하고 바로 응급실로 데려갔다고 한다.

"내가 뭐라고 잠꼬대를 했는데?" 엄마에게 물었다.

"춥다고도 하고, '내 크레파스' 이랬다가, 누구한테 막 가지 말라고도 하고..."

엄마의 말에 나는 빙글빙글 춤을 추던 소녀가 생각났다. 집에 가면 벽에 그린 그림을 살펴봐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피검사를 비롯해 뇌파검사, 엑스레이 촬영, 골수검사까지 받으며 꼬박 사흘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연일 계속된 힘든 검사로 기진맥진해진 나는 할머니를 따라 외가에 가서 며칠 쉬기로 했다.


천방지축 동생이 없는 곳에서 받는 할머니의 보살핌은 마치 사탕처럼 달콤했다.

할머니는 미술대학에 다니는 막내 이모가 쓰다 남긴 커다란 스케치북 몇 권을 내게 주셨다. 전에 쓰던 종이보다 몇 배는 더 넓은 종이에 색색가지 크레파스로 맘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안방에 늘 놓여있는 과자 그릇엔 생강편강, 전병 같은 생과자와 약과, 강정 등이 가득했다. 할머니는 친구들 모임에도 나를 데리고 다니셨는데, 내가 노래를 부르면 할머니들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할머니 손을 잡고 걸어 나오던 골목, 할머니 베프 집 담 위로 흐드러진 하얀 눈 같던 벚꽃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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