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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Dec 15. 2023

친구 만들기 1

나에겐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나 혼자 간직해 온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동안 기억을 저장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잊으면 나의 유년시절이 빛바랜 헝겊조각처럼 볼품없어지고 그 시간들이 더 이상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그럼 지금은 왜 이 이야기를 하려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 특별한 이유는 없다. 소중히 지켜 온 기억들이 흩어지기 전에 이제 그만 내 안에서 꺼내어 보물상자와도 같은 글에 옮겨 담고 싶은 거다. 그리고 보물상자를 열 때마다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것 같은 뿌듯함을 느껴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때 몸이 약했다. 탯줄을 목에 감은 채 엄마 몸에서 엉덩이부터 거꾸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내 몸이 작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기 때 작다는 건 곧 몸이 약하다는 뜻이다. 약하게 태어났기에 살아서 세상 빛을 볼 수 있었으니, 내 삶의 아이러니는 출생과 함께 시작된 셈이다.

친가 외가 양쪽 집안을 통틀어 첫 손녀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데 나몰라 할 어른은 없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이며 보약은 다 내 차지였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잉어 고은 물부터 할아버지 친구분이 운영하는 횟집에서 가져온 구운 생선뼈까지, 온갖 해괴한 음식들을 나는 참고 먹어야 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극성에도 늘지 않는 내 체중만큼이나 내 마음은 언제나 헛헛했다.


내가 받던 관심은 나와 세 살 터울인, 정확히 나보다 2년 5개월 늦게 태어난 남동생에게로 넘어갔다. 엄마 아빠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느낌, 누군가와 엄마 아빠를 나눠야 한다는 현타는 내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부모님은 내게 동생을 잘 돌봐줘야 한다고 늘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에 들어와 엄마 아빠를 떡하니 차지한 아이를 보살펴주기까지 해야 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들었다.

동생처럼 하면 사랑받을까 싶어 옷에 소변을 보기도 하고, 괜히 떼쓰고 울어도 보았다. 동생이 내 장난감을 만지면 빼앗아 동생을 울게 만들었다. 마치 투명인간 같던 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아웃사이더가 돼갔다.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부터 엄마한테 혼나는 횟수가 늘어났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엄마는 한창 미운 나이인 나를 웃으며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퇴근하고 온 아빠에게 엄마는 그날 내가 부린 말썽들을 일렀고, 혼내주라는 말도 덧붙이곤 했다. 엄부자모라는 말은 우리 집엔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엄부엄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무렵 나는 그림 그리는 데 온통 정신을 빼앗겨 있었는데, 아침에 눈뜰 때부터 종이를 찾기 시작해 저녁에는 볼펜이나 색연필을 손에 쥔 채 잠이 들었다. 종이만 보면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사람, 집, 태양, 반달, 강아지, 고양이 등 소재는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집에 누군가 놀러 오면 붙들고 그림을 그려달라 당당히 요구했다. 내가 재미있으니 그도 분명 재미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계속되는 나의 그림 요구가 귀찮아 슬슬 피하는 어른들을 보며, 재미있는 게 사람마다 다르구나 깨닫기 시작했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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