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온 서재 오픈
퇴근 후나 주말, 직원들이 모두 빠져나간 사무실에는 가끔 친구들이 놀러 온다. 그날도 친한 친구 둘이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눈앞에 놓인 John Derian의 픽처북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괜히 자랑처럼 그 책을 가리켰다.
존 데리안은 화가이자 미국의 대표 리빙 브랜드를 이끄는 아티스트다.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고 꾸준히 사랑받는 작가인데, 그때만 해도 그의 아트북은 국내 서점에서 구할 수 없어서 해외에서 주문해 몇 주를 기다려 받은 책이었다.
수채화 느낌의 빈티지한 그림이 가득 담긴 커다란 판형의 아트북은, 당시 나에게 설렘 그 자체였다. 쇼핑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설렘을 주는 물건은 자꾸만 바뀐다.
귀한 책이라 친구들에게 직접 넘겨보라고 하지 않고, 내가 흰 면장갑을 끼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보여줬더니 친구들이 아주 기가 막혀했다. 신난 내 모습이 웃기기도 했고, 책에 대한 애정이 좀 부담스럽기도 했단다.
나도 웃으며 말했다. 나 책을 너무 좋아하는 거 같지 않냐고. 매일 책을 사는 것도 좀 문제인 것 같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주 하는 말이었는데, 그날은 내 애정이 워낙 유난스러워서였는지 친구들도 조금 다르게 말했다.
“리온아, 너는 원래 나누는 걸 좋아하잖아. 책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면, 이 고민도 조금 가벼워지지 않을까? 진짜 책을 주라는 얘기는 아니고, 같이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좋겠어. 유튜브로 보여준다든지.”
친구의 말은 구체적인 방법이 아닌, 방향에 대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그 '함께'와 '나눠봐'라는 말이 내 마음에 자꾸 남았다.
맞아. 나는 원래 그런 걸 좋아하지. 함께 보는 것, 나누는 것. 그러면 내 고민도 조금 덜어질지도 몰라.
지금 내 서재에는 책이 1만 5천 권 넘게 있다. 나조차 다 읽지 못한 책들이다. 이 책들은 집과 사무실의 책장에 그저 꽂혀 있다. 나는 콜렉터가 되고 싶어서 책을 사모은 것이 아니다. 그저 책이 좋아서, 좋아하는 책을 사다 보니 이렇게 됐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책을 두고도 매일 책을 산다. 이게 고민이다. 이런 고민, 쇼핑을 많이 해본 사람은 안다. 과도한 구매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 책들을 누군가와 함께 본다면? 그럼 매일 책을 사도 마음이 조금은 편할 것 같았다.
그 즈음,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모두 기억하겠지만, 초기에는 감염병이 빠르게 퍼지며 일상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나는 신발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는데, 신발은 일상의 즐거움을 전하는 물건이다. 출근, 모임, 결혼식이 모두 제한되던 그때, 우리는 신발 이야기를 꺼낼 수조차 없었다.
신발이 안 팔리는 것보다, 이 시기에 브랜드가 어떤 태도로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할지를 더 고민했다. 그때 마케팅 담당 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신발이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브랜드를 만들고 있는지, 대표가 읽는 책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소통하면 어떻겠냐고.
처음엔 ‘요즘 누가 책 이야기를 반길까’ 싶었지만, 친구가 해준 ‘책을 함께 나누라’는 말과 겹쳐지며 마음이 움직였다.
내 서재를 꺼내 보이고, 공간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와서 책을 볼 수 있게 한다면 어떨까? 내가 읽는 책을 공유하고, 내가 가진 책을 함께 볼 수 있는 장소를 만든다면?
그렇게 ‘서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성수동의 한 카페 위 공간을 마련했다. 가구를 옮기고, 어떤 책을 가져다 놓을지 고민했다. 디자인 전공자답게 디자인 관련 서적, 신발 관련 교재, 아트북, 팝업북, 해외에서 공수한 희귀본, 어른들이 잘 사지 않는 그림책까지 골랐다.
공간은 50평 정도로 넓어서, 큰 테이블에 큐레이션 코너도 만들고 일인용 책상과 의자도 뒀다. 오랜 시간 책을 읽다 갈 수 있도록.
처음에는 일반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책보다는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책을 위주로 구성했지만, 막상 문을 열고 보니 소설, 인문, 철학 등 국내 서적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래서 내 집 서재에서 책을 더 가져오고, 책장도 늘어났다.
오픈 초기에는 사람들이 ‘서점’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왔다가 “책을 살 수 없다고요?” 하고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재’라는 개념을 낯설어했고, 들어오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리온서재가 어떤 곳인지 설명하느라 시간을 더 많이 썼다.
조금씩 ‘서재’라는 공간의 개념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이 콘셉트를 재미있어 했고, 방문도 늘어났다.
‘리온서재’는 말 그대로 내 서재를 옮긴 공간이기도 하지만, 따뜻함이 쌓여서 다시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리온(利溫)’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책을 사는 게 기쁘고, 그 기쁨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귀한 책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때, 책이 상할 수도 있다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더 읽는 것이 기쁘다. 실제로 나는 책을 꽤 깨끗이 보기도 한다.
서재를 연 이후,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와 웃음이 이 공간에 쌓였다. 무엇보다 이 공간 덕분에 나는 여전히 책을 많이 사도 된다는 명분이 생겼고, 책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나는 이곳이 사람들에게 책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책으로 향하는 다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앞으로도 서점이 아닌 서재로, 이 공간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
시간이 더 흐르면, 여기 쌓인 따뜻한 온기가 세상에 스며들기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