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차
해 뜨고 출발했는데도 어둑어둑하네
문득 걷다가 손을 봤는데 깜짝 놀랐다.
살이 너무 탄 거야! 날씨도 쌀쌀하고 햇빛보단 우중충한 날이 많았다고 생각해서 살이 탈거라고는 1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너무 확연히... 살이 타서 놀랐다.
유럽 햇빛 무섭구나
오늘도 어김없이 올리브 밭, 포도밭 실컷 보며 지나왔다.
저 앞쪽에 어마 무시한 구름에 걸친 산이 보였는데.. 첫날 피레네 산맥의 후유증인지 모르겠지만.. 설마 저 산을 넘는 건 아니겠지..?라는 걱정이 또 앞섰다.
출발하고 보이는 뷰가 마냥 좋은 게 아니고 저게 내가 넘어야 될, 걸어야 될 산일 수 도 있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피레네 산맥의 고통이 컸나 보다 허허.
오늘은 한층 더 가을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햇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을 색이 땅에 가득했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보며 걷고 있었는데 친구한테 카톡 하나*가 왔다. (*이 카톡은 밑에서 설명 예정) 그래서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걷다 보니까 어느새 고속도로였다.
다른 순례자 아무도 앞뒤로 보이지 않고, 지나가는 차 운전자들이 다 날 쳐다보는 것만 같고, 느낌이 싸하고 불안해서 주변을 살펴보니까 내가 걷는 고속도로 옆에 있는 산길로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핸드폰에 정신 팔려 있다가 나 홀로 순례길 개척함...
올바른 길로 잘 따라가고 있다가 순간 그 아주 잠깐의 유혹 아닌 유혹에 넘어갔더니 영 쌩판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나 자신! 무서웠다.
표시된 길을 따라 걸을 때는 그게 산 속이든 도로이든 불안함과 걱정이 하나도 없었다. 믿으니까 이게 맞다는걸.
하지만 옳은 길이 아닌 길에서는 아무리 발이 편한 길이어도 불안함과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똑바로 깨어있어야지.
다행히 길은 잘 찾아 다시 순례길로 합류했다. 아주 식은땀나는 에피소드였다. 고속도로라 위험했어 휴
걸으면서 지나온 작은 마을이 있었다. 작고 아기자기해서 쉬어갈까 잠시 고민했었는데, 이다음 마을이 큰 도시인 로그로뇨라는 도시였다. 그래서 조금만 참고 로그로뇨까지 가서 쉬자!라고 다짐하며 다시 걸었다.
사실 오늘 큰 도시에 도착한다길래 너무 초췌한 몰골이면 좀 창피해서 화장도 좀 했다^,^* 화장을 해서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다
걷다 보니 로그로뇨가 저 멀리서 보였다! 목적지도 눈에 보이니 쉬엄쉬엄 걷자~ 하며 중간중간 신발, 양말도 벗어서 발도 쉬어주고 여유 부리며 그렇게 로그로뇨에 입성했다!
로그로뇨는 정말 큰 도시였다. 나 이래 봬도 서울 여자인데 로그로뇨 좀 큰 도시 왔다고 왜 신기하고 뭔가 우와~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신기해.
스페인 와서 처음 보는 이런 큰 도시에 시골처녀처럼 두리번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오자마자 숙소는 뒷전이고 배가 너무 고파서 광장 근처에 있는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로그로뇨까지 왔는데! 맛있는 거 먹어줘야지!
순례자의 모습으로,, 등산복에 땀에 쩔은 머리와 흙이 다 묻은 신발과 가방.. 이 몰골로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왔다. 테이블 세팅도 완벽하고 실내는 엄청 넓었다. 웨이터들이 복장도 갖추고 있는 때깔은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다행히 날 내쫓진 않았지만 나를 한 번씩 다 힐끔힐끔 쳐다봐서 너무 민망했다.
내 옆 테이블에는 중년의 신사분들이 정장을 입고 식사를 하고 계셨다.. 다 왜 절 쳐다보시죠?
안나야 기죽지 마 너 서울 여자야!!
난 순례길을 걸으러 왔지만 순례길인 동시에 놀러 왔어! 유럽여행이야~!
당당하게 메뉴를 시켰다. 이런 고급 레스토랑들은 음식이 나오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기다리다 지쳐 갈 때쯤 음식이 나왔고 너~무 맛있어서 허겁지겁 먹었다. 그야말로 순삭.
근데 10유로 하는 음식이랑 생각해보면 별 차이를 모르겠다.. 내가 배고파서 그냥 뭘 먹어도 맛있어서 그런 거 같다. 그냥 순례길에서 먹는 음식은 빵 빼고 다 맛있다.
그렇게 먹고 쉬고 있는데 첫날 같이 출발했던 한국분들의 카톡 단체방이 울렸다. 다들 로그로뇨라고 하시며 내일 핼러윈도 있으니 다 같이 에어비앤비를 잡고 편하게 하루 쉬는 게 어떠냐는 내용이었다.
오? 내일 핼러윈이었구나! 나도 하루는 쉬고 싶었고 혼자보단 그래도 한국인들끼리 쉬면 안전하다는 생각도 들어서 다시 이분들과 조인했다.
에어비앤비를 잡았고 며칠 안됐는데 그래도 고생하면서 다들 만나니까 반갑더라.
그 와중에 내가 앱을 설치해드리고 도와 드려던 아저씨도 연락이 왔다. 로그로뇨 도착하셨다며.
나는 같이 있던 한국분들에게 혹시 이 분도 함께 있어도 되냐고 허락을 구한 후 다들 흔쾌히 좋다고 해주셔서 아저씨도 우리가 잡은 에어비앤비로 초대했다. 젊은이들끼리 있는데 내가 껴도 되냐면서 너무 고맙다고 하시며 좋아해 주셔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같이 간단하게 마트에서 장도 보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내일 하루 침낭 안 접고 늦잠 잘 생각 하니 흘러가는 밤이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초장에 친구에게 카톡 하나가 왔다고 했었잖아요? 그래서 길을 잃었죠
어떤 카톡이길래 길을 잃었냐면,
친구가 저를 위해 저만을 위한 ccm라디오 어플을 만들어줬어요.
순례길 걸으면서 들으라며 보내줬는데 너무 고맙고 놀랍고!
내가 친구들에게 보내준 풍경에 캘리까지 넣어서 앱을 만들어줬더라고요.
이 정도면 길을 잃을만하죠~?
덕분에 순례길에서 끊기지 않고 설교와 ccm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 면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