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차
어제도 날씨가 꾸리꾸리 하더니 오늘도 역시나..
비바람까지 몰아쳤다.
좀 걸으니까 느끼는 건 비 맞으면서 돌길을 걸을 때가 제일 힘든 거 같다.
그래도 무지개가 떠서 기분이 좀 나아질 거 같... 지만 나아지질 않으니까 그냥 비 좀 안 왔으면 좋겠다.
오늘은 걷다 보니 골프장이 나왔다. 오? 스페인 골프장? 내가 언제 스페인에 골프장을 와보겠냐 하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카페테리아 같은 공간이었고 음식을 시켜 먹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도 자리를 잡고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로 갔다.
영어가 안 통하길래 내 나름대로 배운 스페인어를 하면서 주문을 하는데,,, 직원분이 민망하게 정말 1도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너무해... 좌절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잘생긴 스페인 아저씨가 다가오셨다.
나한테 영어로 주문하려고 하는거지? 뭘 도와줄까?라며 스페인어로 직원분에게 대신 내 주문을 해주시고 나에게 윙크를 한방 날리시고 돌아가셨다... 관상은 과학인 게 확실하다. 잘생긴 사람이 친절하기까지!!
그렇게 혼자 설레서 두근두근~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주 맛있게 먹었다!
다시 걸을 정비를 하고 출발했다. 조금 더 걸으니 전봇대에 무계획이 최고다 라는 문구를 봤다. 너무 공감했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걸 뭐 30일 안에 완주하겠다. 성당마다 스탬프를 받겠다. 등등 그런 계획이 전혀 없어서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비바람 맞으면서 발바닥 아파 죽겠고 춥고, 난 영어를 할 줄 암에도 불구하고 말이 전혀 통하지 않고! 배는 그냥 계속 고프고.. 오늘 너무 내 현실에 짜증과 불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왜 이 고생하면서 이걸 걷는 거지? 재미도 없어! 운동량만 많아서 계속 먹는데 계속 배고프고! 벌크 업하러 온건가.
사실 내가 걸음이 진짜 빠른 편이어서 지금 속도로 가면 산티아고에 도착 후 바르셀로나 비행기 날짜까지 10일 이상 남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산티아고에서 10일 넘게 빈둥빈둥 댈바에는 천천히 그냥 하루에 20킬로씩만 걷기로 생각 했다.
근데 또 한편으론 난 하루 걸려 마을에 도착하는데 차로 오면 20분도 채 안 걸린다. 목적지 산티아고까지는 차로 9시간이면 도착한다. 걷는 게 매우 시간낭비 같은 이 기분....ㅜㅜㅜ
아 이건 좀 내가 생각했던 유럽여행 겸 순례길이 아니다. 어차피 계획도 목표도 따로 없으니 내가 스트레스받을 바엔 그냥 버스 타고 빨리 도착지에 가서 딴 곳을 여행하자 라는 생각도 했다. 걸으면서 혼자 별 생각을 다 했다.
여하튼 여러모로 오늘은 날씨도 우울하고 나도 우울했다.
그렇게 조울증처럼 기분이 오락가락 몇 번 하면서 걷다 보니 오늘 묵을 마을에 도착했다.
역시나 도착하자마자 배가 고파 죽을 거 같았다. 레스토랑에서 주는 양은 나에게 간에 기별도 안 올 거 같아서 마트로 달려갔다. 아마 인생 처음으로 나 혼자 스파게티를 만든 날이었다.
프라이팬 가득 스파게티를 만들었고 나 혼자 다 먹었다. 나 혼자 먹는 양이냐고 다들 놀라더라.
난 진짜 여기서 살 안 찌고 가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것 같다..
내가 만드니까 양도 아주 만족스럽고 맛도 맛있었다! 하하하
한번 직접 해 먹어 보니까 이제 레스토랑은 못 갈 거 같다. 물가가 슬슬 감이 오고 있음...
혼자 맨날 사 먹기만 하다가 마트에서 장 보는데 후추랑 고추가 있길래 샀다! (알고 보니 고추가 아니고 토마토 말린 거였지만....)
순례길도 뭔가 의미 없어지고 스페인 음식도 지겨워지던 참에 매일 저녁 요리를 뭐해먹을까라는 생각에 다시 이 순례길이 좀 신나 졌다.
도착하자마자 3시쯤 애매하게 이렇게 배 터지게 먹고 저녁시간이 됐다.
다들 각자의 저녁을 만들러 부엌으로 모였고 나도 음식 냄새가 나니까 다시 좀 뭘 더 먹고 싶어서 마트에서 샀던 샐러드와 요플레를 꺼내 2차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아까 스파게티 먹는 걸 못 본 사람들은 나보고 샐러드로 식사가 가능하냐며, 다이어트하는 거냐며 걱정의 목소리를 냈다.
ㅎㅎㅎ.. 걱정마요 여러분.. 이거 디저트예요 ^^
오늘 알베르게는 준호텔 느낌이었다. 건물 엄청 크고 순례자 사무실도 깔끔하게 잘되어있었다.
공용공간에는 푹신푹신한 소파도 있고, 콘센트도 많아서 나도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도 실컷 했다~
오늘 이 숙소에는 한국 아주머니가 한분 계신데, 마트에서 장 봐오시더니 뚝딱 돼지불고기랑 부침개를 해 드셨다. 와우...............................
또 손도 크셔서 요리도 많이 해서 다른 한국 학생들이나 사람들 맛보라고 다 나눠주셨다.
그 아주머니 인기폭발이었다.
정말... 역시 여자는 요리를 잘해야 되는 것 같다....
엄마가 항상 요리하는 것 좀 옆에서 보고 배우라고, 요리배워서 남주냐고 다 너 좋은거라며..그랬는데, 리얼 트루였다.
엄마 한국 돌아가면 요리.. 좀 열심히 배울게
ㅜ_ㅜ
아까 준호텔 같다고 한 거 취소...
일단 오늘도 한 공간에.. 최소 50명은 자는 것 같고요..
제일 충격적인 건 2층 침대에 난간이 없어서 너무 무서웠다..
어제 소문에 2층 침대에서 떨어져서 깁스하고 순례길을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이 있다고 들어서 정말 잔뜩 긴장했다. 그리고 숙소에서 자고 일어났더니 핸드폰 없어졌다. 돈이 없어졌다 이런 말도 많아서 소지품들 다 침낭 안에 넣고 같이 잤다.
이제 점점 큰 도시들도 많아지고, 시작점은 다르지만 합류되는 지점의 마을들이 많아져서 순례자들도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좀 느낌이 전과는 달랐다.
긴장해서 그런지 오늘은 사람들 코골이에 잠도 좀 설쳤다.
빨리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