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차
아니 밤새 무슨 태풍이 왔나, 바람소리가 진짜 지붕 뜯기는 소리여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제대로 못 잔 거 처음이다. 흑
해가 뜨기 시작할 때 나와서 슬슬 걸었다.
푸르스름한 아침 하늘.
조금 걷다 보니 푸드트럭이 하나 있었다. 다음 마을 입구에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안에 옹기종기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나도 뭔가 갑자기 저 그림 안에 들어가고 싶어 아침식사 겸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푸드트럭에서의 아침.
빨리 걸어봤자 할 것도 없고 급한 성격을 좀 죽이고 천천히 걷자! 다짐한 후로 도착하는 마을마다 다 조금씩이라도 머물렀다. 다음에 도착한 작을 마을, 앞에 보이는 바에 가서 에스프레소 한잔 주문했다.
유럽 와서 내가 또 달라진 부분이 뭐냐면,
난 원래 커피를 내 돈 주고 잘 안 사 먹을 정도로 커피랑 안 친했다. 회사생활하면서 어쩔 수 없이 마시는 커피 같은 경우는 아메리카노 하나 사면 물에 타고 또 타고 해서 나눠서 3일을 먹었다.
회사 동료들이 내 책상 위에 있는 커피를 보면, 이건 또 며칠 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이런 내가 유럽 와서는 하루에 한잔 에스프레소를 꼭 마시게 됐다.
한국에서 전에 에스프레소를 마셔본 적 있는데 진짜 사약이었는데, 여기서는 다 에스프레소를 마시길래 한번 시켜먹어 봤는데 너~무 맛있었다. 정말 커피. 그 진한 맛. 사약 같은 맛이 전혀 아니었다.
아침에 에스프레소 한잔 먹으면 몸도 따듯해지고 뭔가 에너지가 돋는 느낌이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내가 한국 프랜차이즈 커피들과 친해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유럽 커피들은 정말 너무 맛있는 거 같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몸을 잠시 녹이고 있는데, 주인장 아주머니께서 호박처럼 보이는 아이를 들고 나에게 보여주더니, 스페인어라 잘 모르겠지만 자랑하시는 것 같았다. 예쁘지 않냐며, 좋은 거라고?!
정말 모양이 호박 치고 신기하게 생겼었다. 우와 예쁘다고 신기하다고! 사진 찍어도 되냐고 했더니 뿌듯해하시며 찍으라고. ㅎㅎ 스페인 북부 시골 마을 사람들 다 너무 착하고 귀여우시다.
부엔 까미노~! 인사하고 난 다시 출발했다.
날이 말도 안 되게 맑아졌다. 아침엔 비가 오더니, 날씨가 좋으니 내 기분도 한껏 좋아졌다.
근데 역시 바람은... 이 바람소리를 담고 싶다. 분명히 이 정도 바람은 한국에서는 초강풍주의보라고 재난문자 올 법한 바람세기인데.. 여기는 일상인가 보다.
바람에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앞도 못 보고 모자는 계속 바람 때문에 벗겨지고 정신이 1도 없다.
진짜 바람 때문에 걷는 게 너무 힘들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 나약하다
그리고 너무 춥다! 이제 진짜 겨울이 슬슬 오나 봐!
걷다가 땀나서 발도 쉬어줄 겸 조금 쉬면 이제 몸이 얼어붙는 거 같아서 오래 쉬지도 못한다ㅜ_ㅜ
강제로 걸어야 해.
그래도 예쁜 풍경과 함께라서 좋다.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오늘은 그럼 여기까지만 걷고 쉴까 했지만 그러기엔 아직 1시도 안된 시간.. 하루가 아쉽다. 그냥 점심만 먹고 다시 떠나야지! 하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순례자의 메뉴가 있어서 너무 행복!
와인 한 병 주는 거 진짜 실화입니까 순례자의 메뉴 너무 좋아!!
저거 한병 다 먹으면 오늘 여기서 묵는 나의 미래가 머릿속에 너무 선명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두 잔 정도 먹고 자제했다.
하나 또 놀란 건 후식에 오렌지를 주셨는데 그냥 정말 저 오렌지 통째로 주셨다.... 칼과 함께.
이런 디저트는 또 처음이에요. 기념. 찰칵
와인 먹고 나니까 몸도 풀리고, 기분도 좋아지고 힘나서 6킬로 더 걸어서 조그마한 마을 알베르게에 묵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까 여기가 그렇게 친절하고 밥이 맛있다고 소문난 곳이랜다!
럭키 걸!
저녁을 기대하며 샤워하고 빨래하고 내일 걸을 준비도 마쳤다.
사립 알베르게였는데, 그래서 묵는 사람도 10명 이하였고 조용해서 너무 좋았다!
사실 공립은 싸서 좋은 거고,, 그냥 매일 사립에서 자버릴까 고민도 함..
주인장 노부부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저녁 메뉴!
순례자 중에 베지테리언도 있어서 그 사람을 위한 메뉴도 따로 준비해주셨다.
내 옆에 중국인이 있었는데, 나 참 중국인이 반갑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래도 순례길에서 같은 아시안이라고 반갑더라.
다들 너무 즐겁게 한 테이블에 모여서 이야기도 하고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어제 그 한식으로 인기 폭발하신 아주머니도 이 숙소에서 만났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버스를 타고 20분도 안 걸려서 오셨다고 한다. 내일도 컨디션을 보고 걸을지 말지 하신다며.
그 외에 다른 한국인 학생들도 한 3명 있었다.
딱 보니까 이 아주머니랑 같이 다니면 한식을 매번 얻어먹을 수 있으니 같이 다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주머니도 음식을 제공하는 대신, 말동무도 있고 안 심심하시니까 좋아하시는 거 같고.
내일 뭐 또 어디까지 같이 가자는데,, 난 별로 그 무리에 끼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고 일찍 잠들었다.
숙소가 너무 깨끗해서 처음으로 침낭을 안 피고 잤다.
배드 버그.... 괜찮겠지?
믿어요 주인장 노부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