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의 연속

#13일 차

by annamood





와. 오늘 순례길 역대급인 날이었다.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서 에피소드별로 적어볼게요.





1. 날씨가 진짜 미쳤다. 해발 1100미터이긴 한데 난 스페인이 이렇게 추운 나라일지 몰랐고, 이렇게 추울 수가 있는지 몰랐다. 내가 상상했던 스페인은 태닝하고 바닷가에서 파티하고..

비바람이 정말 탈지구급이었다. 어제는 바람만 불었는데 오늘은 비바람이었다. 나는 우비에 방수 바람막이에 패딩까지 입었는데 아주 그냥 싹~ 다 젖었다. 기능성이 다 무소용이 되는 그런 비바람을 만났다.

돈도 당연히 다 젖고 여권만 지퍼백에 넣어놔서 살았다. 지퍼팩 진짜.. 완전 최고.



20191104_075209.jpg
20191104_075748.jpg






2. 유럽 올 때 유럽 유심 인터넷 12기가짜리 샀다. 하필 오늘 산 타는 중간에 다 써버렸다. 뮤직 이스 마이 라이프였는데... 지도도 못 보고.. 타이밍이 참 뭐 같다.




3. 비바람도 피할 겸 아침 먹으려고 들어간 바에서 호주인 피터와 중국인 웨이웨이를 만났다. 난 순례길 걸으면서 애네를 몇 번 봤는데 커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애네도 여기서 만나서 그냥 혼자 다니기 심심하니까 같이 다니게 된 거라고 하면서 나도 혼자면 자기네들이랑 같이 다니자고 했다. 나는 그냥 뭐 어차피 속도가 비슷하기 때문에 자주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친구로 인사하면 좋으니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 것과 아주 달랐다. 나는 구속? 규칙 같은걸 매우 싫어한다. 자유로운 영혼인데 자꾸 같이 이때 쉬고, 같이 걷고, 같이 밥 먹고 뭐 별걸 다 같이 하자고 하는 거야. 이런 게 싫어서 한국인들과도 멀리했는데! 둘을 딱 보면 재미있어 보이지도 않고 의무적으로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둘이 있어도 재미없으니 사람들을 자꾸 끌어 모으는 거 같은데, 참 보기에 안 좋았다. 이 친구들이 출발하자고 했는데, 난 더 있을 건데? 라며 계속 혼자 마이웨이 하니 알아서 떠났다. 오예.

난 역시나 팀보단 개인위주의 일을 하는게 내 적성에 맞는듯. 이렇게 나를 또 알아갑니다.


20191104_083537.jpg
20191104_093523.jpg




3. 사진에서 보이는 이 길 끝에 경사가 보이나요? 내려갔다가 올라가야 되는 저 경사? 아니 그냥 일자로 다리라도 놔주지........... 그냥 오늘 최악이었다.

근데 저 경사에서 어떤 스페인 부부를 봤는데 내 두 눈을 의심했다. 이 비바람 치는 순례길에 저 경사를 애기와 유모차까지 끌고 걷고 계셨다. 진심으로 존경... 세상엔 참 대단한 사람이 많습니다.



20191104_100012.jpg
20191104_100551.jpg




4. 나는 이렇게 고생하며 걷는 순례길인데 버스 타면 말했듯이 20분이면 다음 마을에 도착한다. 몇몇 한국인들이 컨디션이 안 좋거나 사정이 있다면 그럴 순 있지만, 나에게 너 왜 생고생하냐, 버스 타면 금방 가는데 같이 버스 타자 이런 식으로 내가 걷는 걸 무시해서 매우 기분이 나빴다.




5. 비가 점점 더 거세졌다. 산을 넘으니 조그마한 식당 겸 호텔이 하나 보여서 그리로 비를 피하러 들어갔다.

이미 많은 순례자들이 바글바글했다. 다들 비를 피하러 들어온 거 같았다. 그곳에 피터와 웨이웨이도 역시나 또 마주쳤다. 어색하게 인사를 했고 그 친구들이 있던 테이블에 다시 함께 앉게 됐다. 호주 피터가 내가 오면 엄청 반가워했다. 내 생각엔 웨이웨이랑 같이 다니기 싫은데 말을 못 꺼내는 눈치인 거 같았다. 바보. 으휴.

서양 애들 쿨한 거 같은데 알고 보면 하나도 안 쿨하다니까.

피터를 구해주고 싶지만 난 지금 나 살기도 바빠서,,, 못 구해주겠다. 스스로 길을 찾읍시다.

이 친구들은 간단하게 맥주 한잔씩 하고 있었고, 난 배도 고파서 피자를 먹고 싶었다. 한판을 다 시키기엔 너무 컸다. 근데 배는 고프고.. 메뉴를 보며 한참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스페인 남자가 갑자기 너 피자 먹고 싶니? 먹고 싶으면 하나 시켜. 나랑 반반 셰어 하자. 라길래!! 어머 무초 그라시아스! 한마디 하고 테이블에 같이 앉았다.

이 광경을 본 웨이웨이와 피터가 나에게 엄청 눈치를 줬다. 다시 이쪽 테이블로 오라면서.

정말... 대단한 애들이다. 당연히 난 무시하고 친절한 피자남과 피자를 나눠먹었다.

나중에 피자남이 한 말이었는데, 자긴 내가 당연히 피자 반쪽을 자기에게 덜어주고 나는 친구들이 있는 테이블로 가서 먹을 줄 알았다고 하더라. ㅎㅎㅎ... 난 그냥 피자 한판이니까 당연히 너의 테이블에 앉은 건데 내가 특이한 행동을 한 거였나 보다.... 민망




20191104_120517.jpg
20191104_195508.jpg



6. 난 무조건 어딜 가든 술을 시킨다. 당연히 피자 시키면서 맥주도 시켰다. 그랬더니 피자남이 와우 내 스타일이라면서 둘이 피자와 함께 맥주를 4병 먹었다. 그렇게 신나게 배를 채우고 있었고 밖에는 비가 미친 듯이 왔다. 다들 더 이상 못 간다고 다들 그곳에서 숙박을 할 거라는 이야기들이 들렸다. 나도 밖을 보니 이건 뭐 장맛비여서 숙박을 하려 했는데 이미 만실이라는 말에.. 모두 다 좌절.

피자남이 다음 마을로 가자고, 자긴 지금 떠날 거라는 말에 나도 용기를 얻어 따라 나왔다!





7. 정말 비 싸다구를 맞으면서 걸어갔다. 이름도 어려운 아타푸에르카라는 유적지 같은 마을에 도착했다. 옷도 다 젖고 너무 춥고 해서 그 마을에 조그마한 바에 또 들어갔다. 몸을 녹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피자남은 순례길하며 내가 걸었던 북쪽의 에스텔라라는 마을에서 출발했고 가방 짐만 24킬로이며 순례길을 따라 캠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스페인 현지인이랑 이렇게 오래 영어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는데,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밌게 대화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제 벨로라도라는 마을에서 음식 나눠 먹으면서 친해진 이태리 커플을 만났다. 어제 아디오스! 하면서 이제 못 볼 것처럼 헤어졌었는데, 민망하면서 반가웠다.

이렇게 헤어졌다가도 만나고, 순례길은 재밌고 또 세상은 참 좁다.




8. 아타푸에르카로 다른 순례자들도 또 속속 도착했다. 한 병 마시다 보니 또 두병 세병이 되어가고 있었다. 등산화는 물론이고 이젠 속옷까지 쫄딱 젖어 진짜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내가 더 이상 못 가겠다고 난 이 마을에서 쉬겠다고 했다. 숙소를 알아보러 밖으로 또 나가야 되는데 도저히 젖은 겉옷을 못 입고 있으니, 피자남이 대신 나가서 마을 내에 순례자 숙소를 찾아줬다. 그 숙소로 옮기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경사진 길에서 만난 유모차를 끌고 걷는 스페인 부부를 만났다! 자기네가 에어비앤비인지 뭔지 그런 걸로 집을 하나 렌트했는데, 너희 아직 숙소 못 구했으면 우리가 구한 숙소에서 자도 돼.라고 제안해주셨다. 정말 너무 감사했다!

그렇게 그 부부가 예약한 숙소로 들어왔다! 집주인이 와서 여권도 일일이 확인하고 집 키를 내줬다. 집주인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오픈 후 우리가 첫 손님이었고, 내가 스페인사람이 아닌 첫 외국인이라며 친절히 대해주셨다!

맞다 난 외국인이었지.


집도 너무 좋고 따듯하고 애기까지 총 5명만 있어서 너무 좋았다.



20191104_173938.jpg
20191104_173949.jpg



9. 우리를 초대해준 이 스페인 부부와 애기.. 정말 대단하다. 난 내 몸뚱이랑 가방 하나만 들고 걸어도 힘든데, 애기를 유모차에 태워서 이 고생을 하시다니.

저녁을 해주시겠다며 직접 식사 준비까지 해주셨다. 가방에 있던 각자의 비상식량들도 꺼내서 함께 나눠 먹었다.


애기도 너무 귀여워!

내가 스페인어를 몰라서.. 애기랑 나랑 유일하게 말을 잘 못해서 잘 통했다.

애기가 처음엔 낯가렸는데 금방 날 좋아해 줬다! 같이 숨바꼭질도 하는데 얼굴만 안 보이면 잘 숨은줄 아는 건 어떤 나라 애기던 공통인가 보다 ㅠㅠ 귀여워!


20191104_184842.jpg
20191104_184200.jpg
20191104_181505.jpg
20191104_192817.jpg
20191104_192843.jpg
20191104_192936.jpg





10. 아.... 다 좋았고 즐겁고 평화롭게 이 밤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자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깨서 화장실을 갔다. 볼일을 보고 나오려고 하니까 문이... 안 열리는 것이었다.

바깥에 거는 게 있었는데 그게 걸린 거 같은 느낌이었다. 아............ 최대한 아기가 안 깨게 나름대로 똑똑똑도하고 피자남도 불러보고 하는데 화장실도 하필 2개라서.. 움직임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이쪽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말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고... 난 그냥 여기서 잠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좌절하고 있는데 그 순간 피자남이 왔다! 안나? 이러길래!!!!!! 헬프미!!!!!!!

구출됐다! 정말 눈물 날 뻔했다 흑.





난 오늘 하루 정말 많은 걸 느꼈다.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다른 사람들 다 버스 타고 갈 때 난 그래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내 다짐을 지켰다.

내 두 다리 멀쩡한데, 아프지 않은 이상 걷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걸었다.

남들이 보기엔 무모하고 시간낭비 같고 생고생한다고 하지만 난 오늘 길 걸으면서 정말 좋은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 안에 목표와 가치만 뚜렷하다면 아무리 비바람이 치고 안좋은 환경이어도 그 환경 자체가 장애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모든게 의미 있는 것이었다.

또 사람에게 상처 받지만 그 가운데 또 만나게 되는 사람들로부터 위로도 받았다.

진짜 두 번 다신 안 올 정도로 힘들지만, 이왕 한번 온 거 몸만 허락한다면 계속 걷고 싶다.

다행히 물집이나 아픈 곳이 없어서 감사하다!


20191104_094846.jpg
20191104_103447.jpg






번외.


어제 마을 걷다가 만난 이탈리아 남자가 있었다.

난 걷고 있었고 그 남자는 길 중간에서 쉬고 있었다. 이름은 말해줬는데 기억이 안 나고....

여하튼 부엔 까미노! 인사하고 지나가는데 나보고 you are so beautiful!라고 했다.

그래서 Thank you! 하고 그냥 웃어주고 지나갔다. 이탈리아 남자.. 당연히 입바른 소리라고 생각하고 그냥 웃고 말았다.

그. 런. 데

어제 한국인 오빠가 카톡으로 자기 숙소에 이탈리아 남자가 있는데 안나를 찾는다면서 나보고 어디냐고 연락이 왔다. 난 그 전 마을에 묵고 있다고 했고 그렇게 마무리됐다.

그리고 오늘 길 걷다가 피자 먹었던 그 가게에서 한국인 순례자들도 엄청 많았었다!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는데 갑자기 날 보더니 "어?, 안나? 맞아요?" "이탈리아 남자분이 엄청 찾으세요" 라며.. 한국인만 보면 다 안나 어딨냐고 물어보고 다닌다고 했다. 심지어 나를 위해 꽃까지 준비해서 걷고 있다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오늘 너무 힘들었는데 그래도 그런 소리 들으니까 나도 여자라고 기분이 엄청 좋았다.

참 저도 꼭 다시 보고 싶네요!

순례길 위에서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

그는 조용히 걸었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내일 죽게 될지라도, 그의 두 눈은 다른 양치기들이 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지 않았는가.

그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연금술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