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와 1:1대치

#3일 차

by annamood








아직 침낭을 접는 속도도 매우 느리고, 침낭의 공기를 완전히 빼지 못해서 침낭의 부피가 많이 줄어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나 스스로 접었다. 뿌듯. 왕뿌듯.

어제의 라면 국물 또는 와인 때문인지 감기 기운은 괜찮아졌다. 다만 어제 30km를 비바람을 맞으며 걸어서 컨디션이 좋진 않다. 그리고 난생처음 등산배낭 약 15kg를 매고 다녔는데, 학교 책가방은 매 봤어도 이런 무거운 등산용 배낭을 메는 법을 알 터가 있나,, 배낭을 잘못 매서 어깨랑 골반이 다 멍이 들었다.

내가 배낭을 어설프게 메고 힘들게 걷는 모습을 본 다른 한국인 순례자 분이 나를 불러 세웠다. 배낭을 그렇게 메면 아프다고, 엉덩이에 배낭이 닿으면 안 된다면서 친히 내 배낭의 어깨끈부터 허리끈을 몸에 맞게 조절해주셨다. 뭐가 그렇게 다를까 반신반의했는데 조절 후 다시 배낭을 멘 순간.. 헐..........충격

정말 확실히 안정감이 들면서 어깨가 하나도 안 아팠다. 무게감도 안느껴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은인이에요. 군필 남자 최고!




오늘도 평지는 아니었다. 근데 이보다 더 싫은 게 있었다. 돌길. 돌길 진짜 너무 발바닥이 아팠다. 정말 이때까지 등산화, 등산복, 등산 가방 이런 아웃도어 용품들부터 브랜드들 다 무시했었는데 이제 절대 아니다.

등산복 덕분에 어제 비바람에도 버티고 걸을 수 있었고, 등산가방 덕분에 어마어마한 짐을 가방 하나에 다 넣고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등산화 덕분에 뾰족뾰족한 돌길에도 선방하며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밀 무기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발가락 양말!

처음엔 내가 발가락 양말까지 신어야 되나? 했다. 근데 오늘 아침 문득 멋을 차릴 때가 아니다 라는 생각과 함께 발가락 양말 신고 그위에 등산 양말 하나 더 신고 등산화를 신었다. 신기하게도 순례길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 중에 나만 순례길을 마칠 때까지 한 번도 발에 물집이나 발에 이상이 없었다.

떠나기 전, 나에게 발가락 양말을 선물해준 나의 현명한 친구 릴리에게 감사를!



아 어제 빨래와 건조를 맡긴 나의 옷들을 오늘 다시 입으려고 입었는데 주머니 안에 이어폰이 나왔다.... ^^

이어폰은 지금 이 순례길에서 거의 필수품 아닌 필수품인데, 빨래에 건조까지 해서 망가졌을게 뻔했다. 어제 빨래 맡기기 전 주머니 확인도 안 한 내가 너무 원망스럽고 아침부터 신경질이 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 핸드폰에 연결해봤는데, 엥? 웬걸? 아주 멀쩡히 작동이 됐다!! 할렐루야! 건조기 때문에 빠짝 말라서 괜찮아 진건가? 신비로운 전자기기의 세계



조식인 빵과 오렌지 주스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오늘도 아침 일찍 나왔다. 아침 공기가 너무 좋고 일출 때의 풍경이 정말 너무 예뻐서 아침 일찍 나올 수밖에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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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까미노 산티아고에서는 단 하나의 장면뿐이 기억나지 않는다. 멋진 풍경에 취해서 얼마나 걸었을까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앞 뒤로는 다른 순례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터벅터벅 걸으며 산속을 지나고 있는데 내 두 눈을 의심했다. 내가 지나가야만 하는 그 길 위에, 그 산속에 황소. 뿔 있는 황소. 내가 아는 한우 그 정도 소가 아니고 리얼 황소.

키우는 소도 아닌 거 같은 게 뿔이 매우 길고 뾰족하며 몸집이 한우의 한 3배 정도?..

키우는 소들은 귀 또는 코에 표식이 있는데 얘는 종도 안 달려있고 표식도 하나 없는 황소랑 돌길에 1:1 대치 상황이었다.

어제의 독수리에 이어 소를 보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식은땀이 흐르고, 이 황소는 도대체 어떻게 여기 이 산속에 있는 걸까 등 오만가지 생각과 함께 정말 너무 무서웠다. 심지어 나는 관종이라 사진 하나 찍을 법도 한 여자인데 사진 하나도 못 남길 정도로 정신이 없고 공포에 떨고 있었다. 순례길 와서 소뿔에 박혀서 죽고 싶진 않았다. 나는 너보다 약하고 심지어 너의 먹이사슬에 전혀 영향이 없는 하찮은 존재다라는 나의 마음을 이 황소가 알아주길 바라며, 눈을 피하고 몸을 움츠리고 지렁이 마냥 땅 위를 기어가다가 싶이 지나갔다. 세 번째 날의 순례길은 그 황소뿐이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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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을은 Jubiri라는 정말 작은 동네 마을이었다. 스페인 수도원에서 25km 정도 걸어왔다. 도착하니 두세 시쯤 되었고 다음 마을로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난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공립 숙소가 비수기라 영업을 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좀 비싸지만 깔끔한 곳으로 숙소를 잡았다. 한 방에 이층 침대 2개가 있었고 4명 중 3명은 한국인, 1명은 에콰도르에서 온 아저씨였다. (이 아저씨랑 앞으로 재밌는 썰들이 많이 있음). 오늘 나는 에콰도르 아저씨 위의 2층이 내 잠자리다.

대충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점심을 먹으러 마을로 나왔다. 아침 그 빵 쪼가리 하나 먹고 이제까지 걸었더니 정말 너무 허기지고 뭐라도 먹고 싶었다. 아주 작은 슈퍼마켓 겸 바가 있길래 들어가서 제일 만만한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알코올은 필수!

먹고 옆 슈퍼마켓에서 이 좋은 날씨와 햇살을 즐기려고 로제 와인 한 병과 하몽을 샀다. 스페인은 또 와인과 하몽이지! 그렇게 사서 마을 냇가에 앉아 먹으니 이제야 순례길에 온 게 행복하고 너무 좋았다

이때 앞으로 이렇게 매일 여유롭게 걷고 마을을 즐겨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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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순례길이 아니고 술례길인지... 감이 슬슬 오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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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가 되었고 같이 방을 쓰는 한국분들과 함께 슈퍼마켓에서 간단히 스파게티 장을 보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공용 주방이라 같은 숙소를 쓰는 순례자들이 먼저 요리를 하고 있어 순서를 기다렸다.

한쪽에 벽난로가 있었는데 난 스페인이 추운 나라라는 걸 몰랐다. 오기 전 바르셀로나에 사는 친구에게 물었을 때도 춥다고는 안 했는데.. 아 나는 바르셀로나가 아니고 북쪽이구나...


스페인에도 벽난로가 있고, 내가 지금 이렇게 추운 날 이 고생길을 걷는구나 라는 살짝 현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평생 먹을 스파게티, 순례길에서 다 먹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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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한국 분들과 같이 소화시킬 겸 동네 구경을 갔다. 마을 안쪽으로 가니 바가 있었고 스포츠 센터 같은 건물이 있어서 맥주 하나씩 들고 경기를 구경했다. 뭔지는 1도 모르겠지만... 날씨는 좀 쌀쌀했지만 딱 좋았다. 그리고 마을은 아기자기 정말 예뻤다. 큰 도시 말고 이렇게 작은 도시? 마을들의 매력에 푹 빠질 것만 같았다.

이번 마을 일행들 덕분에 사진도 찍고 동네도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입구 쪽에 방명록이 있어서 나도 나의 자취를 남기고 왔다!




소소하지만 이런 일상,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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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숙소에 도착한 다른 순례자들에게 황소를 봤냐고 물어보니 아. 무. 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말도 안 된다며 오늘 나의 썰을 믿지 못하였다.


아 억울하다

혹시 스페인 수도원을 출발하여 가는 길에 황소를 보신 분 아무도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