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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집 탐방

여행기가 독후감이 돼 버렸네......

by 문간방 박씨


악마 같은 한 사람을 죽여서 훗날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살인은 죄인가, 죄가 아닌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처음 접한 건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와 보니 거실에 큰 상자 2개가 있었다. 엄마는 오빠가 대학 가려면 논술도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그 당시 비싼 돈을 내고 세계문학전집을 주문하셨다. 책 뒤편에는 책을 다 읽어야만 답을 할 수 있는 몇 가지 논술형 질문이 있었다. 45권 정도 되어 있던 그 책은 오빠 책상과 나란히 있던 내 책상 옆 책장에 전부 꽂혀 있게 됐다. 엄마는 오빠가 그 책을 좀 읽기를 바라셨지만 오빠는 책을 읽는 것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다행인건지 모르겠지만 오빠는 대학을 갈 때나 회사 입사를 위해서 논술이 필요했던 적이 없었다.


나는 새 책이나 새 잡지를 처음 열어서 냄새 맡는 걸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내가 특이하다고 했지만 엄마는 내가 특이한 게 아니라 별난 거라고 하셨다. 누군가의 손 때가 묻기 전에 새 책 앞장을 쫙 펴서 냄새를 맡고 얼른 첫 페이지를 읽고 싶었던 나는 마음이 급했다. 동방예의지국에 살고 있으니 나이가 많은 오빠가 새 책을 먼저 볼 수 있게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내가 새 책을 열어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됐다.


세계문학전집 1번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죄와 벌을 읽으면서 가보지 못한 러시아의 어느 거리를 상상하면서 읽었다. 작은 관사에서 오빠와 방을 같이 쓰던 나는 어른이 돼서 러시아에 가게 될 거라는 기대는 단 한 번도 안 했다.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죽이기 위해 도끼를 숨겨서 걸어가던 지저분한 골목길과, 노파를 죽인 후 피에 묻은 옷을 지우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던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내 상상 속에서나 그려본 곳이었다. 하지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죄와 벌"의 골목길은 실제로 존재하던 곳이었고 어렸을 적 내가 상상하던 곳과 매우 유사했다.


상상 속의 골목길이 실제로 존재하던 곳이었다니... 나는 그곳에서 신기한 경험을 한 것만 같았다.


살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집을 찾아가 볼 생각은 안 해봤다. 박봉에 서울에 내 집 마련도 눈 앞이 캄캄한데 러시아 대문호의 집에 관심 가질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집에 무척이나 가고 싶었던 엄마의 계획에 따라 나는 그의 집을 찾아 나섰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이틀 전 우리는 막바지 일정에 마음이 급했다. 초가을이지만 오후 4시가 되면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저녁이 되니 날씨는 더 쌀쌀해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또 다른 한 손은 현금이 들어있는 가방을 잡고 걷다 보니 긴 머리카락이 거슬렸다. 결국 나는 상투머리로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러 갔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걸었던 좁은 골목길을 걸을 때는 엄마를 앞장 세웠다. 내가 앞장서서 걷다가 뒤따라오던 엄마가 봉변을 당할 뻔한 에피소드도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생이던 시절에 "죄와 벌"이라는 소설 하나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내 기분을 다소 찝찝하고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성인이 된 나는 그의 집을 찾는 것이 큰 시련이었다. 어두워진 거리에 책과 지도를 한 손에 들고 현금이 들어 있는 크로스백은 코트 안에 넣고 손으로 잡고 다니다 보니 손이 꽁꽁 얼었다. 날이 어둡고 배도 고파서 다 때려치우고 호텔에 가서 스파나 하고 싶었다.


망할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느 집구석에 처박혀서 산거야?


우리나라 같으면 이 정도 대문호의 집은 큰 표지판에 붉은 화살표 방향으로 표시를 해 놨을 거다. 지도에서 분명히 이 건물이라고 표시를 해 둔 그 건물을 3바퀴째 돌다가 나는 포기했다. 결국 떼로 몰려있던 러시아 청소년 다섯 명 중에서 담배를 안 피우던 한 아이한테 도스토예프스키 집을 물었다.


미안한데.... 도스토예프스키 집을 찾으려고 하는데 혹시 아니?

아...... 지도를 보니 여기가 맞긴 하는데...... 나도 어딘지 모르겠네?

하하하 너도 한 번도 안 가봤구나?......


그 소년은 내 말이 멋쩍었나보다. 금발의 소년은 뒤통수를 긁적긁적하더니 갑자기 환호성을 치면서 손가락으로 뒤에 있던 건물을 가리켰다. 그의 집은 우리가 서 있던 곳 바로 뒤편에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집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블라미지를대로 11번지 3층 집이다


1층과 2층은 현재 가정집이니 반드시 3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집'이라는 표시도 전부 러시아어로만 돼 있으니 정말 꼼꼼하게 찾아야 한다.



모스크바에 있던 미술관에서 만난 도스토예프스키 초상화다


1879년에 찍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진이다. 정말 옛날 사람처럼 생겼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피우던 담배다. 어떻게 아직까지 이런 걸 보존해놨을까?


깔끔한 부엌이 내 스타일이다. 저 투각 접시와 멀리 보이는 앤틱 잔들이 탐났다. 가까이 가서 보고 싶었지만 안에는 못 들어가게 줄이 쳐 있다


저 책상 앞에 앉아서 어렸을 때 내가 읽었던 작품들을 썼으려나? 본인의 작품을 읽고 머나먼 한국에서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도스토예프스키도 상상도 못 했을 거다


"죄와 벌" 소설이 나오고 150년 후에 한국판 라스꼴리니꼬프 장대호가 나타났다. 장대호 기사 댓글에는 그의 행동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기사에 달린 댓글을 하나하나 다 읽어봤던 것 같다. 그리고 장대호 사건이 잊히기도 전에 N번방이 등장했다. 착실하고 엄마와 여동생의 기대를 받고 있던 법대생 라스꼴리니꼬프의 손에 도끼가 들려 있었다면, 현대판 라스꼴리니꼬프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그들 역시 조용하고 성실하다는 평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범행을 은폐하려고 피 묻은 바지와 도끼를 숨기려고 했지만 순간순간 터져 나오던 편집증적인 불안함은 핸드폰 안의 기록을 지우려고 애를 쓰면서 더욱더 본인의 흔적을 드러내던 N번방 참가자들의 불안함과도 유사하다.


현대판 "죄와 벌"은 앞으로도 반복되고 색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보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 여행을 위해 휴가 결재를 올렸을 때 사장님은 그때도 나를 본인의 딸처럼 걱정해 주셨다. 가서 굶고 다니지 말라고 햄버거값을 쥐어 주시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다닐 거냐고 물으셨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장님. 저 딴짓 안 해요. 제가 보고 싶었던 박물관하고 미술관 그리고 발레 공연 전부 다 보고 올 거예요 사장님. 이번에도 꼭 무사히 돌아옵니다 하하하

내가 너를 못 믿는 게 아니야... 세상을 못 믿는 거지...


소설 속 주인공은 매춘부 소냐와의 만남을 통해 진심으로 죄를 반성하게 됐지만 21세기 라스꼴리니꼬프들의 결말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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