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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Oct 25. 2020

1박 2일 마산 여행기

마산에 추억이 많아요

4살 때 아빠 발령으로 H에 온 이후 나는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 내려갔다.

외갓집은 마산에 있었다. H에서 마산에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천안역까지 2시간 30분을 통일호를 타고 간 후에 천안에서 40분 정도 머문 후 다시 무궁화호로 갈아타야 했다.


H역에서 통일호를 타면 내 자리에는 항상 입석표를 끊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거의 대부분 노인 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내 자리라고 표를 보여줘도 못 일어나겠다고 자는 척하거나 버티는 속수무책의 노인분들이 많았다.


초등학교에 입학도 안 했던 나는 그런 상황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기차에 올라타기도 전에 '누군가가 내 좌석에 앉아있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참 많이 했다. 게다가 내 자리에 앉아 있다가 화장실에 잠깐 갔다가 오면 그 사이에 누군가가 또 내 자리에 떡 하니 앉아있었다. 내 자리를 지켜주려고 아득바득 소리치며 나 대신 싸워주던 오빠 덕분에 나는 항상 내 자리에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좌석에 앉으면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서 엄마는 달력을 바닥에 깔아 주셨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가 바닥에 앉기도 하며 긴 시간을 기차 안에서 버텼다.


통일호에는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음식을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때만큼은 엄마가 버터오징어랑 월드콘을 사 주셨다. 버터오징어를 먹기 전에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물티슈로 손을 닦고 오징어를 손으로 잘라서 먹었다. 월드콘은 어찌나 얼었던지 이빨이 들어가지 않아서 한참을 손에 들고 있다가 먹었다.


천안에 도착해서 무궁화호로 환승하기 전에 제일 먼저 엄마는 공중전화로 이제 3시간 뒤면 마산에 도착할 거라고 외할머니께 안부를 전했다. 무궁화호에 오르기 전 40분의 짧은 시간 동안 엄마는 천안역 근처에 있던 포장마차에서 가락국수와 어묵을 사 주셨다. 그날만큼은 평소 먹어보지 못하는 군것질을 실컷 할 수 있었다.


H에 살면서 엄마는 자주 힘든 모습을 보였다. 관사 내에서의 텃세도 엄마를 힘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미취학 아동이었던 나는 그런 엄마의 감정을 빨리 읽었던 듯하다. 엄마가 힘들어서 도망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기 때문에 나는 만약 6세 인생에서 가장 큰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온다면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천안에서 마산으로 기차를 갈아타는 그 순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혹시라도 엄마가 아무 연고도 없는 천안에 나를 버리고 갈까 봐 걱정이 돼서 엄마 손은 항상 잡고 다녔다. 가끔은 '나를 버리기 직전이라서 이렇게 맛있는 것을 잔뜩 먹이나?'라는 의심도 했었다.


무궁화호에 올라타면 통일호에서 만났던 그런 어른들은 없었다. 내 좌석은 거의 비어 있었다. 가끔 누가 앉아있더라도 내가 표를 들고 있으면 사람들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궁화호를 타고 3시간이 흐르면 방송으로 마산역에 곧 도착한다는 말이 들리고 곧이어 이모부의 병원 간판까지 보였다. 그러고 나면 몇 분 뒤 마산역에 도착했다.




금요일에 휴가를 내고 마산에 내려왔다.

이제는 통일호와 무궁화호도 없어졌고 엄마가 나를 버릴 거라는 불안함도 없다. 긴 시간 여행도 지루하지 않게 버틸 수 있는 성인이 되었고 이제는 군것질도 좋아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목요일 밤을 데드리프트로 불태웠더니 엉덩이가 곤장 100대를 맞은 듯 욱신거렸다. 게다가 새벽 일찍 출발하는 바람에 마산에 내려가는 동안 계속 잠만 잤다. 자고 일어나 보니 어느 순간 마산에 도착해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기도 전에 나는 부림시장에 가서 6.25 떡볶이를 먹었다.  

 

떡볶이를 화분 받침에다가 주는 것이 이 집의 특색이다. 찾아와서 먹을 맛은 솔직히 아니다. 어렸을 땐 다른 집에서 떡볶이를 먹었는데 배고팠던 시절이라 그런지 그때가 훨씬 맛있었다


3.15 의거탑은 이번에 처음 봤네. 혼자 사진 찍고 글을 읽으니 관광객인 게 티가 났나 보다. 어르신들이 흐뭇하게 쳐다보셨다
몽고간장 본사다.  본사 바로 옆에 있던 우물은 너무 현대식으로 고쳐놔서 별 감흥이 없었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진 않았다. 하지만 마산에 가면 국제시장 황정민이 결혼한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봤다. 3.15 의거탑에서 도보로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무료로 예식을 올릴 수 있어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이 곳에서 결혼을 한다. 내일도 한 커플이 결혼식을 한다고 사장님께서 준비 중이셨다


주위에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도 임신하기 전까지 혼인신고를 안 한 친구들이 참 많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서 왜 그런지 물어봤더니 서류를 더럽히기 싫다고 했다. 그거야 본인들 자유지만, 그럴 거면 어떻게 한 이불 덮고, 돈 관리를 서로 믿고 하는 걸까? 남들이 하니까 결혼은 하는데 책임은 지기 싫다는 걸까? 그렇게 살다가 헤어지면 미혼인 척 또 다른 사람을 만날까? 등등 이런저런 것을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동료들에게 실례가 될까 봐 입을 다물었던 적이 있다. 내 가치관과 다른 결혼식의 의미 때문에 나는 결혼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신신 예식장 사장님과 대화를 하면서 또 많은 생각이 바뀌었다.


신신 예식장 사장님은 굉장히 유명하신 분이었다.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 보니 아빠 대학 선배님이시기도 했다. 사장님은 어렸을 적에 너무 가난해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공짜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게 장소를 제공하고 사회까지 전부 사장님께서 무료로 봐주신다고 하셨다. '허례허식 없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추억을 남기는 것도 재밌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드레스룸에 가서 마음이 바뀌었다. 준비되어 있는 수십 벌의 드레스 중에서 내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원래 이 색깔인지 아니면 세월의 직격타로 색이 바랜 건지, 심지어는 다이어트를 안 하고 지금 내가 입어도 사이즈가 전부 넉넉한 것들이었다. 막상 결혼식장을 둘러보니 나도 드레스는 포기 못하는 여자구나 싶었다.


화장실 뒤에 신랑 신부 대기실도 있고 사진 촬영하는 곳도 있었다
90세 가까이 되신 신신 예식장 사장님께서 내 이름을 넣어서 글을 써 주셨다. 이렇게 살도록 노력해야지


신신 예식장에서 나와서 외갓집으로 향했다. 주변은 많이 바뀌었지만 전부 눈에 익은 곳이었다.


어렸을 적엔 정말 대단한 부잣집이었는데 지금은 다들 어디 가서 사는 걸까?


녹이 잔뜩 낀 담장이다. 찔리면 파상풍 걸리겠네


2018년에 문재인 대통령이 학문당에서 책을 사셨다고 한다. 오래된 책방을 구경하고 싶고 책 냄새를 맡고 싶다면 한 번쯤은 방문해도 좋을 역사적인 서점이다.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께서 도서상품권을 참 많이 주셨다. 여기서 책 많이 사서 H에 들고 간 기억이 난다. 그땐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텅텅 비어 있더라


저녁은 회를 먹기로 했다. 마산 어시장은 내 숙소에서 가까웠다. 여기서 모둠회를 사 먹었다.

올해 처음 맡아보는 바다 냄새다. 마산에서 산다면 거의 매일 어시장에 와서 해산물을 잔뜩 사갈 텐데 말이다. 매일 해산물 파스타 만들어 먹을 듯...


마산에서의 숙소는 모텔로 잡았다. 1박에 7만 5천 원이었는데 크고 깨끗한 모텔이었다. 마산에 호텔이 있긴 했지만 너무 오래돼서 모텔이 낫겠다 싶었다. 그런데 모텔 키를 받고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냄새가 썩 좋지는 않았다. 내가 모텔에서 숙박하는 것을 아는 친구한테 카톡이 와 있었다.


친구 : 공용으로 비치되어 있는 거 절대 쓰지 마. 음료도 조금이라도 개봉되어 있는 거 같아서 의심스러운 거 절대 먹지 말고!

Sorita : 왜?

친구 : 이상한 사람들 많아서 거기에 뭐 넣어 두기도 하거든

Sorita : 뭘 넣는 건데?


그 후로 친구에게서 답은 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소품(?)이 많았지만 개봉이 되지 않은 것 중 내가 쓸만한 것만 골라서 사용했다. 텔레비전을 보려고 하니 리모컨에는 대놓고 '성인채널'이라고 주인이 표시를 해뒀다. 성인채널이 궁금했지만 윤석열 아저씨의 국정감사 재방송을 놓칠 수 없었고, 드라마 앨리스까지 시청하고 나니 피곤해서 바로 잠이 들었다.

침구는 깨끗했지만 베개가 나한테 너무 높았다


남쪽이라 그런지 마산은 서울보다 훨씬 따뜻했다. 잠을 자면서도 더워서 땀을 뻘뻘 흘렸지만 2층이라서 창문을 열어놓고 잘 수도 없었다.


성과급 받은 걸로 1박에 50만 원짜리 호텔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나는 결국 집보다 훨씬 못한 어두컴컴한 마산의 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잘 때 가끔 윗집(?)에서 테이블 같은 것을 끄는 소리가 몇 번 나서 깬 것 빼고는 아무 불만 없이 푹 잤다. 모텔 근처에는 도보로 10분만 걸으면 스타벅스도 있었다. 오전 8시에 문을 여는 스타벅스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일어나자마자 씻고 모텔 밖을 나오니 세상 밖이 새삼 환했다. 어두컴컴한 모텔에 있다가 나오니 눈을 뜰 수조차 없었고 해가 중천에 뜬 줄도 몰랐다.


스타벅스 3층에는 마산 청소년들이 아침부터 와서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집에서 편하게 자지 왜 카페에서 척추 휘어지게 자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2층의 창가 자리에 앉았다. 환한 햇볕을 받으며 두유 라테에 샷을 추가해서 마시니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세상 행복했다.


마산 앞바다 뷰를 기대하고 갔는데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수협 냉장 뷰였다. 그래도 좋은 날씨에 맛있는 커피를 마시니 마치 내가 뉴욕 한복판에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행복했다


1박 2일로 마산을 구경하고 서울에 돌아왔다. H에 살 땐 마산이 대도시 같았는데 지금은 아직도 그때 그 옛 모습이 거의 남아 있는 낙후된 도시였다. 수리가 안된 오래된 간판을 보며 길거리를 걸을 때는 마치 시간 여행으로 나만 훌쩍 커서 과거로 되돌아온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내 모습은 수시로 변화한다. 하지만 옛날 모습 그대로의 건물이나 그때 그 장소에 들어가면 여전히 남아 있는 그곳 특유의 냄새가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지나 놓고 보면 아빠의 발령을 따라서 3번이나 새로운 곳에서 살았던 경험이 참 소중하다. 할머니 댁에 방문하면서 지금은 가질 수 없는 기차 안에서의 소중한 추억도 만들 수 있었다. 다만 영원히 나와 함께 있을 것 같았던 외할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눠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수능을 보고 나서 내가 그토록 원하던 귀를 뚫고 외갓집에 왔을 때 할아버지는 마치 처녀가 임신을 한 것 마냥 화를 내시며 나를 집에서 쫓아내셨다. 할아버지는 본인만의 원칙에서 흔들림이 없는 꼬장꼬장한 분이셨다. 엄마와 결혼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우리 아빠를 돌아가시기 몇 년 전까지 말도 건네지 않았던 분이셨다.


사실 이번에 외할아버지의 박물관에 간 후기를 브런치에 사심을 가득 섞어서 홍보도 하려고 했다. 하지만 1단계로 조정이 됐는데도 박물관이 코로나 영향으로 문을 열지 않았다. 언제까지 여기다가 글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년의 어느 따뜻한 봄날에 할아버지의 박물관에 방문하게 된다면 외할아버지를 주제로 이 곳에 꼭 기록을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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