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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Oct 21. 2020

아빠가 재취업하셨다

정년이 없는 내가 본 정년퇴직하신 아빠 이야기

아빠는 38년 동안 한 직장에서 근무하셨다


한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하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다. 내가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받으며 생활을 해 보니 '과연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라는 의문까지 든다.


내 인생보다도 더 긴 38년이라는 세월의 끝에 아빠는 2년 전에 정년퇴직을 하셨다. 정년퇴직을 1년 정도 앞둔 시점에서 아빠는 남은 기간 아무 탈 없이 정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셨다. 왜냐하면 아빠와 한 울타리에 계셨던 많은 아저씨들이 구설수에 오르거나 '무사히' 정년을 마치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H와 I에 살던 시절 관사는 나를 둘러싼 작은 사회였다.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도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다. 거의 매일 뉴스에 등장하는 특정 공무원들의 불명예스러운 사건사고들은 그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언론에서 그 조직을 집중 조명할 뿐 그런 사건들은 우리 관사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H에 있을 때 같은 동에 살았던 바로 옆집은 겉보기에 굉장히 조용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아주머니보다 체구가 훨씬 작았던 아저씨는 화가 나거나 술을 마시면 감정 조절에 실패하는 분이셨다. 그리고 그 화살은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그때 당시는 이런 일도 이웃 간에 모른 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관사 네 동에 사는 그 어느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그 집안일에 개입하려고 들지 않았다. 심지어 바로 옆집이었던 우리 부모님도 떠들썩한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에게 모른 척하라고 하셨다. 가끔 나는 중학생이었던 언니 오빠네 집에 놀러 가서 같이 놀았다. 옆집 아저씨도 내 인사를 웃음기 없는 얼굴로 항상 받아주셨다. 하지만 영화 '아담스 패밀리' 분위기를 물씬 풍기던 그 집과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빠가 I로 발령이 나서 우리는 이사를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사 가는 당일 아침에 그 집 식구들은 우리 가족을 초대해서 아침 식사를 대접해 주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우리 부모님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집에 들어가서 다 같이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그 집 식구들은 거의 말수가 없었다. 이삿짐 차에 오르기 전 옆집 아주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에 만원을 쥐어주셨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에게 만원은 정말 큰돈이었다. 엄마는 이사 가는 길에 우리에게 따뜻한 밥을 대접해주시고 이삿짐 차가 떠날 때까지 배웅해준 옆집 가족이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랐다. 하지만 몇 년 후 나보다 7살이 많았던 오빠는 구치소에 갔고, 언니는 결혼 후 정신병원에 갔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I로 이사 오고 난 후 내 머리는 굵어졌다. 엄마 아빠가 속삭이며 하는 대화에도 나는 무슨 일인지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삼류 아침드라마 뺨치는 에피소드들이 유독 I에서 많이 벌어졌다.


같은 동에 살았던 1층의 아주머니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을 겪고 난 후 기도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기도원에서 아주머니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하더니 어느 날 아주머니는 온몸에 멍이 든 채로 사망했다. 아저씨는 보상금을 꽤나 많이 받았고 그 돈은 초등학생이었던 두 딸이 대학까지 마칠 수 있을 정도의 큰 액수였다. 하지만 얼마 뒤 관사에 낯선 젊은 여자가 등장했다. 엄마는 나에게 아저씨가 재혼을 했으니 그 여자분께도 깍듯하게 인사를 잘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중학생이었던 내 눈으로 봐도 그분은 좋은 엄마로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관사가 또 시끄러워졌다. 그 여자는 아저씨의 전 재산을 들고 중국으로 도망쳤다. 아저씨는 조선족이었던 그 여자를 잡으려고 애를 쓴 것 같았지만 끝내 잡지 못했고 아저씨와 두 딸은 관사에서 나가서 그 후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무도 소식을 모른다.


아저씨가 아이가 있는 여자와 재혼한 집도 있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거의 매일 등교를 같이 했던 그 친구는 두 명의 이복동생과 새아빠 사이에서의 삶이 쉽지 않았던 것 같았다. 17평이라는 작은 평수의 관사에서 생판 남인 세 남자와 사는 게 힘들었는지 틈만 나면 가출을 했다. 그 친구의 엄마는 관사에서 가장 젊은 엄마였다. 그분은 중학생이었던 나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중학교 생활도 평탄하지 않았던 그 친구 역시 새아빠의 발령을 따라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그 친구의 아빠는 몇 년 후 회사 내 여러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해서 젊은 나이에 해고를 당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친오빠랑 살던 나도 매일 개와 고양이처럼 치고받고 싸웠는데 나보다 한 살 어린 그 사춘기 소녀는 심적으로 많이 불안했겠구나 싶다.


그 이후로 불륜 때문에 여자가 직장까지 찾아와서 해고되고 이혼하신 분들이 있었다. 불륜 커플과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곳에 발령을 받아서 술을 잔뜩 먹고 아빠한테 찾아와서 아이처럼 펑펑 우신 분도 기억에 난다. 그리고 정년퇴직을 몇 개월 앞두고 미투에 걸려서 해고되신 분도 있었다.


회사일의 고단함에 4~50대에 명예퇴직을 하셨던 분들은 퇴직금으로 꿈꿔왔던 사업을 하셨다. 하지만 회사 밖은 더 힘들었는지 그분들은 아빠한테 자주 연락을 해서 조언을 구했다.


2년 전 아빠의 정년퇴직을 축하하기 위해서 오빠와 나는 휴가를 내고 지방으로 내려왔다. 아빠와 함께 일했던 많은 직원들과 한 자리에 모여서 축하받고 사진을 찍으니 아빠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아빠는 I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2주일 만에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년퇴직을 하기 몇 해 전부터 아빠는 이미 서올에서의 기반을 닦아놓으셨기 때문이다. 퇴직 후 한가로울 것 같았던 아빠의 삶은 또 다른 새로운 보금자리를 알아보고 임장하러 다니느라 바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내 피부양자로 등록이 돼 있던 아빠가 피부양자 자격에서 벗어나서 매달 30만 원씩 건보료를 내게 됐다. 아빠는 30만 원의 건보료를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셨다. 그러다가 '희망일자리 사업'에 지원을 하셔서 며칠 전부터 첫 출근을 하고 계신다. 오전 9시에 출근을 하여 3시간 정도 일을 하시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분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고 하셨다.


하루 일당은 8,590원 * 3 + 5000원 (점심값) =30,770원이고 4대 보험 가입이라 월급식으로 입금이 된다. 1년 근무 경력이 있으면 근무 중 내는 건보료를 "임의계속 가입"신청하면 현재 내고 있는 건보료 30여만 원을 내지 않고 재직 중 건보료 약 5천 원~8천 원 정도를 3년간 내게 되는 혜택이 있었다. 결국 아빠는 매달 내던 건보료 30만 원을 절약함과 동시에 매 달 월급까지 받게 되셨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40대 초반부터 정년 이후의 삶에 대한 계획을 세우시던 아빠를 보면 세상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정답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아빠가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가셨거나 불명예스러운 사건으로 이른 나이에 직장을 잃었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삶 또한 지금과 정반대로 흘러갔음에 틀림없다. 퇴직 후 새롭게 주 5일 일하게 된 아빠를 본받아 정년이 없는 나는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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