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른 선택을 했던 한 사람을 그리며_보고타

지금은 잘 지내고 있기를

by 문간방 박씨

5년 전 콜롬비아로 휴가를 결정했던 그때 그 순간들이 기억난다.


드라마처럼 현실 도피를 계획하며 지구본을 있는 힘껏 돌려서 검지 손가락으로 딱 찍은 그곳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처음 찍은 곳이 듣도 보도 못한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이었다. 내기는 삼세판이 기본이니 지구본을 두 번 더 돌렸으나 이런 곳을 갈 바에는 차라리 회사가 낫겠다 싶을 정도의 '여행제한국가'들이 걸렸다.


결국 그 당시 나로서는 가장 이성적인 결정을 했다.

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중남미로 가기로 결심을 했고, 추석 연휴를 끼면 2주라는 최장 휴가를 사용할 수 있었던 혜택을 이용하여 나는 보고타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혹시라도 좌석이 없을까 봐 콜롬비아로 떠나기 5개월 전에 항공편을 예약했고, 휴가계는 상사의 마음 준비를 할 시간을 고려하여 1달 전에 냈다. 그때 당시도 개에로멕시코를 타면 보고타 직항이 있었지만 돈을 절약하기 위해 인천-달라스-보고타행으로 계획을 짰고, 85만 원에 왕복 티켓을 구입했다.


당시 나는 지금 떠나지 않으면 회사 생활을 더 이상은 못 버틸 것임을 확신했다. 상무님도 그걸 아셨는지 내가 떠나기 1주일 전에 100불을 손에 쥐어주시면서 여행 잘 다녀오라고 응원해 주셨다. 이렇게 나는 후임 두 명에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보고타로 떠났다.


아직도 미국은 가 본 적 없는 서울 사람이지만, 브라질과 콜롬비아를 경유하면서 LA와 달라스 공항을 구경하면서 미국 공기를 마셨다. (특이하게 미국은 중남미를 경유할 때 공항 밖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더라) 인천-달라스에 도착하니 한 미국 할아버지 스튜어디스가 영어로 써진 내 이름을 팻말로 들고 있었고, 몇 번 게이트로 이동하라고 알려주셨다. 달라스-보고타로 이동하는 승객은 인천-달라스행 비행기를 타고 온 90%의 한국 사람 중에 나 혼자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정말 신났다.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나서 현실을 잊고 여행만 하고 싶었던 내 계획과 딱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년 전 나는 그렇게 콜롬비아 보고타에 놀러 왔다.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 그때는 확신했었기 때문에 단 하루도 헛되이 놀지 않겠다고 다짐한 채 정말 알차게 구경을 다녔다. 보고타에 오기 전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곳이 바로 보테로 미술관이었다.


보테로의 작품은 전부 뚱뚱하다. 뚱뚱한 것 치고는 여성의 가슴이 너무 작은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매번 드는데 이것 역시 해학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 고양이도 뚱보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말근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정도 말근육을 만들려면 식단 조절과 운동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할 듯하다
콜롬비아도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많았다. 그것을 그림으로도 표현했고, 콜롬비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빨간 지붕을 넘나드는 뚱뚱한 도둑과 역시나 가슴만 작은 나체의 여인이다
실제로 보면 정말 크기가 큰 작품이다. 색감이 매우 예뻐서 이래서 유명한 화가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여인인데 혀를 내민 모습이 우습다. 오른쪽은 뚱뚱한 여자아이를 안고 멍 때리는 아빠의 모습이다
보테로 미술관에는 작은 정원이 있다. 가끔 10대들이 이곳에서 춤 연습을 하던데 한국 10대들이 훨씬 잘 춘다. K팝이 뜨는 데는 이유가 다 있는 듯


5년 전 나는 이곳에서 나보다 3~4살 정도 어린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한국사람이 그리운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도 한 유학생이 나에게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외국 나가서는 한국사람을 더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잘 대꾸를 하지 않는 편인데, 보테로 미술관에서 만났던 그 여자는 얼굴에 고민이 정말 많아 보였다. 그녀는 코시국 이전에 브런치에서 흔한 소재였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무작정 여행을 온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


Sorita : 혼자 왔어요?

그녀 : 네......

Sorita : 숙소는 어디예요? 보고타에서 이런 치마 입고 다니면 위험할 텐데요

그녀 : 호스텔에 한국사람들 있어서 남자들하고 다녀요. 어젯밤엔 클럽 가서 놀고 오늘은 여기 혼자 온 거예요

Sorita : 구시가지는 밤에 위험하니까 절대 혼자 다니지 마요. 클럽은 현지인들도 밤에 잘 안 가요

그녀 : 네......


그녀는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 집과 멀지 않아서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 왜 이곳에 이렇게 우울하게 혼자 있는지 궁금해졌다.


Sorita : 여행 왔으면 즐겁게 놀아야지 왜 이렇게 우울해요?

그녀 : 무서워요

Sorita : 뭐가요?

그녀 : 회사 때려치우고 온 건데 한국 돌아가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서요


어쩌다 보니 나는 한 고민녀의 이야기를 보테로 미술관에서 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회사를 퇴사하고 콜롬비아에 온 지 1주일도 안됐는데 벌써부터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Sorita : 콜롬비아 여행 끝나면 바로 한국 가는 거예요?

그녀 : 아뇨, 칠레에 갔다가 브라질도 갈 거예요

Sorita : 이동 계획은 다 짰어요?

그녀 : 아뇨, 어떻게든 되겠죠. 한국 사람들 만나면 같이 가려고요


이 친구는 아무 계획 없이 퇴사한 후 여행을 떠났고, 여행지에서도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서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만약 내가 여행자라면, 앞으로 칠레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속수무책인 이 여자와 여행을 절대 가지 않을 텐데 말이다. 나는 그녀에게 이제부터 여행은 시작이니 한국에 돌아와서 재취업할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 마음껏 즐기고 안전한 여행을 하라고 짧은 조언을 남겼다.


그녀는 대뜸 나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우리는 각자의 핸드폰에 사진을 남겼다.

나는 혹시라도 여행하다가 도울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내 명함을 한 장 줬지만, 그 후로 그녀에게서 연락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5년 후 지금은 그 친구가 서울에서 어떻게 지낼지 가끔은 궁금하다. 결혼해서 나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거나 아이 엄마가 됐을 수도 있겠지. 5년 만에 보테로 미술관에 돌아와서 그 친구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던 그 정원을 바라보니 문득 그때가 그리웠다. 그 시절엔 너나 나나 다 어렸고, 둘 다 힘든 시기에 콜롬비아로 도피를 온 사람들이었는데 말이다. 만약 지금의 내가 그때의 Sorita에게 해 줄 말이 있다면 앞으로 나의 미래는 훨씬 더 힘들고 고비가 있을 테니까 남 걱정하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충고해 주고 싶다.


그 친구와 앉아 있었던 벤치가 보인다. 보테로는 단순한 작품도 많이 그렸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 역시 멍 때리고 있네
심지어 해골도 뚱뚱하다
군인 그림과 정물화다. 정물화 오른쪽에 손 하나가 삐쭉 나와있는 것도 재밌는 포인트다


보테로 미술관에는 보테로 작품만 있는 게 아니다.


딱 봐도 르누아르 작품! 한국 같으면 르누아르 작품 앞에 수십 명이 몰려 있을 텐데 보고타 미술관에는 관람객들이 많지 않다
5년 전에 봤던 달리의 조각상, 가운데 피카소 작품, 오른쪽에 내가 좋아하는 샤갈의 그림까지 있다
보테로 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모나리자다. 5년 전 이 작품 앞에서 인증샷을 정말 많이 찍었었는데 여전히 이 작품은 인기가 좋았다
보테로 본인이 그림에 등장한 작품도 몇 개 있다. 오른쪽 말도 엄청 뚱뚱하고 신경질적으로 생겼다. 건드렸다가는 뒷발 치기 당할 듯.
화려한 색감의 꽃다발이다. 실제로 보면 정말 색감이 아름다우니 보고타에 오면 꼭 보테로 미술관을 방문하자. 입장료는 무료다


보테로 미술관 근처 구시가지에는 보고타 전통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몇 군데 있다.


코로나 방역 수칙으로 수저와 포크를 절대 맨손으로 주지 않는다. 의외로 이런 건 잘 지키더라. 보고타에 오면 수프를 꼭 먹자. 완두콩, 닭가슴살, 옥수수가 듬뿍 들어간 영양식이다


이제 중남미 식당에 가면 메뉴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식탁 위에 있는 QR code로 인식해서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해야 한다. 5년 전과 다르게 이곳도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다만 메뉴판이 거의 스페인어로만 되어 있으니 가기 전에 기본적인 음식 단어는 꼭 숙지하고 가서 먹고 싶은 음식을 당당히 시켜먹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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