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탈출기
나는 시장 구경을 좋아한다. 왁자지껄한 시장통 속에서 흥정하면서 돌아다니고, 길거리에서 서서 먹는 것도 꿀잼이다. 3박 5일간 세부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택시를 타고 경비가 삼엄한 대형마트를 돌아다녔다면 마지막 날은 역시 로컬마켓을 꼭 가줘야 했다. 로컬마켓이야말로 그 나라의 화장기 없는 맨얼굴이기 때문이다.
덥고 습한 날씨 속에서 남자들은 상의를 탈의한다. 중국 남자들보다 상체가 슬림하고 똥배도 없는 모습이 비교적 볼만 하더라.
오래된 건물을 수리해서 고쳐 쓴 듯한 모습이지만, 베란다에 나무와 여러 종류의 화분으로 예쁘게 꾸며둔 모습을 보면 유럽의 여느 집 못지않다.
싱싱하고 통통한 당근과 각종 야채들이 엄청나게 싸다.
하루 해가 저무는 시간인데 상인들은 파장할 생각도 안 하는 듯했다. 물건을 못 팔았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흥정이라도 할 법한데 태연하게 앉아들 있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내가 방문했던 그 날이 종교적으로 무슨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그래서 각종 퍼레이드와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왔다.
현지인 99%에 외국인은 나 포함해서 1%였던 세부의 로컬마켓이다. 치안은 보장할 수는 없지만 가방만 앞으로 매고 다닌다면 세 번은 가볼만하다. 워낙 큰 시장이라서 하루 날 잡고 다 둘러보기에는 체력적으로 만만치 않을 거다.
로컬 시장을 1시간 돌아보는 동안 시장바닥의 먼지라는 먼지는 다 뒤집어쓴 것 같았다. 중간중간 구걸하는 아이들이 팔을 잡고 돈을 달라고 했지만, 지갑을 꺼내는 순간 내가 구걸해야 할 처지에 놓일 것 같아서 한 푼도 주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노을이 지는 카본 마켓을 걸으며 나는 평온함을 느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카본 마켓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노을이 지는 이 시간쯤에는 얼마를 벌었는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겠지.
오늘 같이 힘든 날에는 카본 마켓의 사진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산전수전 다 겪어봐야 더 단단해지고 성숙해진다지만, 그 과정이 너무 쓰디쓰다. 지금도 쓴 물이 올라온다.
다양한 과정을 겪으면서 배운 것도 많지만, 항상 그랬듯이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현재 나는 좋지 못한 점수에 마음이 몹시 아프다. 그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또 돈이 들어간다는 점에 평소에 있지도 않은 역류성 식도염까지 생기는 것 같다.
나답게 무던히 그리고 슬기롭게 넘기고자 한다. 어차피 끙끙 앓는 다고 해서 불합격이 합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전에 힘들게 일하고 오후에 부랴부랴 시험 본다고 수고한 나 자신을 조금 위로해 주려고 한다. 어차피 끝장을 볼 거 정신 차려야지 우울해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카본 마켓의 노을은 오늘도 아름다웠을 거다. 반복되는 하루도 아름답게 추억이 되는 경우도 있고, 가끔은 쓰디쓴 실패를 겪을 때도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