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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Mar 29. 2020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안전할 줄 알았는데

이상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아빠는 원룸 건너편에 위치할 예정인 한 브랜드 아파트 분양을 받았다. 12년 전에 분양을 받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수월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빚을 내서라도 아파트 2개 이상은 분양받을 거다.


아파트 분양을 받는다는 것은 20대의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1. 위험한 원룸 탈출
2. 경비아저씨가 수시로 순찰
3. 분리수거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밤에도 언제든지 밖에 나갈 수 있다
4. 아파트 단지 안에 헬스장이 있다
5. 원룸보다 훨씬 큰 내 공간이 생겨서 방 정리가 수월해진다
6. 은행 대출을 갚기 위해 나는 가장 버티기 힘들었던 신입사원 4년을 이자가 더 불어나지 않게 최대한 빨리 갚을 생각으로 버텼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아파트로 이사해 보니 매우 좋았다. 그때 18층에 살았는데 엘리베이터가 2개여서 원룸에 살 때 1층부터 5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속도와 아파트 1층에서 18층까지 올라가는 속도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원룸에서 살 때는 5층에 8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18층에서는 우리 집과 신혼부부 집 딱 두 가구뿐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났다.

이 아파트 역시 재개발지역 한가운데 지어진 것이라서 밤이 되면 빌라에서 사시는 분들이 소주나 막걸리를 들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와서 한밤중까지 소리치며 술을 마셔댔다. 아침이 되면 놀이터와 공원은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심지어 단지 안에 심어 둔 작은 나무나 꽃 그리고 조명등을 전부 뽑아가는 도둑들이 기승을 부렸다.


안타깝게도 경비아저씨들은 내가 생각했던 분들이 아니었다. 60~70세의 할아버지 경비분들이 순찰을 도셨기 때문에 아파트 순찰보다는 단지 내 아이들에게 훈수를 두는 걸 더 좋아하셨고, 술판이 벌어지는 외부인들의 행패에는 못 본 척 지나가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부터 매일 밤 경찰차가 정문에서 후문까지 훑고 지나갔다. 아주 잠깐 드라이브식으로 지나가는 경찰차였지만 10명의 경비원들을 보는 것보다 경찰차를 보는 것이 정신적으로 위안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퇴근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평소 주민 의견이나 공지 사항이 있는 게시판에 눈에 띄는 종이가 눈길을 끌었다. 바로 '바바리맨'이 우리 아파트에 나타났다는 거였다. 아파트 내부에는 CCTV가 있기 때문에 바바리맨의 행적도 전부 CCTV에 잡혀서 게시판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화질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바리맨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고화질로 바바리맨의 얼굴을 확대해도 모자랄 판에 모자이크 처리를 한 것이 의문이었다. 게다가 게시판에는 정확히 몇 동에서 이 일이 발생했는지를 써 놓지 않았다. 아파트 가격이 떨어질 수도 있을 거라는 불안함이었을까? 지금과 비교했을 때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보안이 있던 현관 시스템이었는데 바바리맨은 어떻게 자유롭게 출입을 할 수 있었을까? 혹시 주민은 아닐까? 등등 나는 또 사는 게 불안해지고 찝찝해졌다. 나는 그냥 안전하고 조용히 내 집에서 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들은 내 일상에 이렇게 침입을 할까?


나는 이제 더 이상 원룸에 살던 소심한 대학생이 아니었다. 사회생활의 비바람을 3년 간 맞아가며 상사의 변덕에 익숙해져 있었고, 내 인생 최고의 또라이와도 3년간 일을 해 봤고,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내가 마무리를 짓고 끝내야 했던 불공정함 속에서도 마음의 평온을 찾기 위해 아등바등하면서 여린 마음에 굳은살이 생기고 굳은살이 티눈이 되었다. 게다가 회사 내에서 지금은 절대 용납이 안 되는 성희롱적인 농담에도 나는 매일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바바리맨 따위가 무섭다는 생각을 안 했다.


아파트 게시판에는 바바리맨의 행적에 대해 굉장히 자세히 적어놨었다. 그는 입주민이 현관문을 들어올 때 같이 따라 들어와서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같이 기다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2층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서 2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2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뉴스에나 나오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거였다.


집이 18층이라서 단 한 번도 계단으로 올라가 볼 생각을 안 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바바리맨의 행적을 따라 2층 계단으로 갔었다. 당시 내가 한참 헬스장에서 80kg을 어깨에 이고 스쿼트를 하던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바바리맨처럼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잡고 순식간에 2층까지 뛰어 올라가서 그 짓을 하기에는 나로서도 체력이 벅찼다. 헉헉거리면서 옷을 벗을 수 있을까? 바바리맨의 체력이 엄청 좋구나! 혹시 운동선수나 트레이너 아냐?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때 마침 1주일 간 서울로 출장을 온 사촌 동생이 갈 곳 없다며 재워달라고 찾아왔다. 아파트가 소란스러운 마당에 1살 어린 남자라도 있으니 마음만큼은 든든했다. 사촌 동생은 내가 바바리맨에 대해 고민을 하고 분석을 하는 것에 대해서 쓸데없는 짓 한다고 엄청 뭐라 했다. 그러다가 바바리맨 하고 마주치면 어찌할 것이며 (신고할 건데?) 아파트 단지라도 헬스장에서 밤 11시에 집으로 돌아오는 건 너무 늦다. 빨리빨리 다녀라. 왜 저녁은 안 먹고 다니냐 등등 엄청난 잔소리를 해댔다. 내가 아는 사촌 동생은 저녁을 먹을 때 맥주가 없으면 안 되고, 평소 주량이 엄청나고, 고등학교 때부터 담배를 폈던 불량스러운 녀석으로만 생각을 했는데 이 녀석이 나한테 훈수를 두는 게 의외였다. 그 녀석 카톡 프사에 있던 여자 친구도 이 정도로 잘 챙길까? 가족이라고 나한테 사사건건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우스웠지만 1주일 동안은 동생 말을 잘 듣고 다녔다. 동생은 일주일 내내 내가 헬스장에 가 있는 동안 시간 체크를 하는 둥 카톡을 계속 보냈다.


언제부터인가 바바리맨은 엘리베이터 게시판에서 빠지게 됐다. 그가 붙잡였을 거라고는 생각을 안 한다. 만약 붙잡였다면 단지 내 헬스장에서 아주머니들의 정보망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지금은 정신 차리고 정상적인 멘털로 지내고 있을까? 그는 누군가가 본인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이렇게 글을 올렸다는 생각을 전혀 못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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