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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Apr 01. 2020

포르쉐 타러 떠난 막내 이야기

막내가 퇴사한 지 1년이 됐다

제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추락해서 S과장도 죽었으면 좋겠어요


부서에서 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힌 우리 팀 막내가 한 말이다.


야! 그럼 너도 죽잖아?
저 죽는 건 상관없어요. S 과장만 죽으면 돼요. 
야아~~너네 둘 말고 나도 타고 있을 땐 절대 그런 생각 하면 안 돼! 알았지? 
ㅋㅋㅋ네.....


나도 회사 다니면서 꽤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막내는 본인이 죽어서라도 S 과장이 죽기를 바랐던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하면 본인을 희생해서라도 죽이고 싶은 심정이 들 수도 있구나... 이런 식으로 자폭테러가 나오는 건가 싶었다.


우리 막내는 퇴사한 지 1년이 됐다. 오늘이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다.

막내는 내가 지금껏 만났던 사람 중에 세계 20위권 안에 드는 대학을 나온 가장 학벌이 좋은 사람이었다. 한국 국적이 아니라서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던 게 회사 생활을 하면서 남자들 사이에서 조금 걸림돌이 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전화를 당겨 받아서 지방에 있는 공장 사람들과 예기치 않게 통화할 때면 사투리를 하나도 못 알아들어서 애를 먹었다. 게다가 한글로 메일을 쓸 때면 나에게 어색한 문장이나 압존법에 문제는 없는지 검토를 부탁했다. 예의가 바르지만 회의나 발표를 할 때면 손가락이 떨리는 것이 내 눈에 보일 정도로 긴장을 많이 했다. 하지만 막내는 나랑은 스스럼없이 지냈다. 본인 일이 끝났어도 내가 야근할 때 막내는 종종 남아서 나와 퇴근을 같이 했다.


속치마가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었던 습했던 어느 한여름에 나는 샌들 신고 이태원에 위치한 한 대사관에 가다가 샌들 끈이 끊어져서 길바닥에 대자로 넘어졌다. 대사관 근처에는 당연히 신발가게 하나 없었고 그나마 간신히 찾은 문구점에서 5천 원짜리 삼선 슬리퍼를 하나 사서 신고 대사관에 갔다. 혹시 복장 불량으로 입장이 안되면 어쩌나 싶었지만 천만다행으로 나는 전혀 문제없이 업무를 마치고 회사로 복귀했다.


가끔 외근 나갈 시간이 없어서 서류를 전부 준비해서 대사관에 맡기는 업무를 막내한테 부탁한 적이 있었다. 막내는 외근 나가서는 항상 버거킹에서 햄버거를 사 먹었다. 불편한 동료들끼리 먹는 것보다 밖에서 햄버거 먹는 게 훨씬 좋다고 했고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게 햄버거라고 했다. 인스턴트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는대도 살이 안 찌는 것을 보면 축복받는 몸이었다. 막내는 외근 갈 때도 항상 정장에 백팩을 단정히 매고 나갔다. 그런데 가끔 대사관 입구에서부터 제지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간신히 대사관에 들어가서도 대사관 직원들은 완벽히 준비가 된 서류에 사사건건 막내에게 태클을 걸었다. 결국 그다음 날 내가 똑같은 서류를 가지고 다시 갔을 땐 아무 문제없이 업무를 처리해서 왔다. 동료들은 그 새*가 의심스러운 새*여서 제지를 당한 거라고 우스갯소리로 말을 했지만 나는 진심으로 아직도 의문이다. 몇몇 대사관에서 왜 그랬을까?


대리 진급을 몇 개월 앞두고 막내는 본인은 대리로 진급이 안될 거라고 자신 없어했다. 일보다 더 힘든 사회생활에 퇴사하고 싶어 했던 막내를 마지막까지 잡았던 건 나였다. 나중에 이직을 하더라도 대리는 달고 가는 게 그나마 재취업이 쉽기 때문에 이왕 4년 넘게 참은 거 몇 개월만 더 참아보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막내는 상사에게 단호히 본인 입장을 밝혔다. 우리 부서는 인력이 항상 부족했기 때문에 상사는 몇 번이나 막내의 퇴사를 만류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어이없게도 막내는 퇴사 처리가 됐다. 사회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무서운 곳이었다.


퇴사가 확정되기 3개월 전부터 막내는 내가 야근할 동안 본인 자리에서 여행 계획을 짰다. 막내 자리가 복합기 근처라서 나는 왔다 갔다 하며 막내의 컴퓨터를 들여다봤다. 막내는 퇴사를 하고 나면 포르쉐를 타고 유럽 여행을 떠날 거라고 했다. 천만 원을 보증금으로 내면 포르쉐를 빌려서 자동차 공장 투어를 할 수 있다나? 본인의 오랜 꿈은 포르쉐를 타고 유럽의 지방 투어를 다니는 거라고 했다. 숙소는 싸구려 여관방에서 잠만 자면 된다고 했다. 차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나였지만 지긋지긋한 이 조직에서 해방이 돼서 유럽에서 자유를 만끽할 계획을 짜는 막내가 부러웠다. 그런데 막내는 과거에 차 사고를 두번 낸 사건이 있었다. 한 번은 고속도로에서 거래처 사람들을 모시고 가던 중 졸음운전으로 고속버스를 박았고, 또 한 번은 회사차를 주차하다가 주차장에서 사고를 낸 적이 있었다. 두 번의 사고는 다른 부서에 알려지지 않도록 속전속결로 우리 부서 내에서 급히 마무리를 지었다. 이랬던 막내가 포르쉐는 잘 몰까 싶었는데 막내는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큰 걱정 없다고 했다.


1년 전 오늘 회사를 떠나면서 막내는 나와 언제 밥이라도 먹자는 약속을 했다. 그런데 막내는 퇴사를 하고 나서 오후 2시까지 잠을 자느라고 연락이 잘 안 됐고 (회사 다니면서 불면증이 있었다고 한다) 가족 여행으로 영국과 캐나다 여행을 다니느라 나보다 더 바쁜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얘기가 이래서 나오나 보다) 그리고 계획했던 대로 포르쉐를 빌려서 한 달 이상 유럽 곳곳을 잘 둘러보고 왔다고 한다. 비록 여행 도중 핸드폰을 도난당했지만 정말 멋진 경험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나한테 줄 마그넷 몇 개를 샀다고 하는데 언제 받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막내가 지금 취업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한다. 다만 과거 회사를 다니면서 정신과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부분들을 다 털고 정말 본인과 맞는 직업을 잘 찾길 바랄 뿐이다. 모쏠이지만 본인은 꼭 한국 여자를 만나서 결혼할 거라던 다소 독특했던 우리 막내의 지난 1년은 어땠을지 궁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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