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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Mar 31. 2020

말하지 않아도 알까요?

신기한 체험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돈 버는 것이라고 나는 장담한다.

어딜 가서 공짜밥 얻어먹기란 쉽지 않다. 남의 돈 받아먹기엔 치사하고 더러운 일도 많다.


첫 직장을 잡고 평소 내가 부모님께 받아왔던 생활비의 4배가 회사에서 만들어준 월급 통장에 찍혔다.

한 달 간은 회사에 보탬이 된 일을 한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24살의 나는 처음으로 큰돈을 받고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엄마가 내 이름으로 만들어준 통장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가끔 받은 용돈과 부모님으로부터 매달 고 3 때까지 받은 용돈이 찍혀 있었다. 그 통장의 총금액이 내 첫 월급과 비슷했다.


두 번째 월급을 받을 때가 다가왔을 때 나는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국내에서도 충분히 매출을 잘하는 회사가 2007년부터 해외사업을 시작했는데 내가 들어오기 전 2년 간 일을 했던 직원들이 너무도 안 좋게 퇴사를 한 풍문을 끊임없이 들었다. 나도 질질 끌려서 내쫓길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업무를 잘 배워서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도 많고 모든 게 두려웠다.


나 나름의 몇 가지 목표와 분양받은 억 소리 나는 집값을 빨리 갚자는 생각으로 4년을 버텼다. 새벽 2시까지 쌓여있던 술병 사이에서 여직원 혼자 인내하며 버틴 후 받은 "값진"대리비도 그때 당시 어린 나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버티다 보니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타회사에서도 근무 중에 이직 제의 연락이 왔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만둬야겠다 싶을 때 또 다른 보상이나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꾸준히 일을 했다고 해서 지금의 회사 생활이 퍽퍽하지 않은 건 아니다. 밤이 되도록 혼자 남아서 일을 해보면서 나는 무서운 게 소복 입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아직도 안 갔냐며 문을 벌컥벌컥 여는 타 부서 직원들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불 다 꺼진 건물에 현관문 셔터가 내려져서 도둑처럼 뒷문으로 살짝 열린 셔터 사이로 고개를 숙여서 빠져나오며 나는 큰 숨을 쉬었다.


일은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겠구나 


서둘러서 집에 가야 하는데 나는 야근을 할 때마다 베이커리나 스타벅스에 들러서 평소에 안 사던 케이크나 빵을 사서 집에 들고 갔다. 지난 몇 년간은 왜 굳이 내 발길이 집 대신 가게로 향했는지 몰랐다. 그런데 문득 생각을 해보니 힘들 때마다 생각이 나고 의지가 되던 것이 가족이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겪는 속상한 모든 일들은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을 때 슬픔과 불쾌한 감정까지 현관 앞에 두고 집에 들어갔다.


내가 만나왔던 몇몇의 사람들은 본인들의 힘든 얘기를 나한테 하소연하듯이 풀어놓았다. 나는 항상 그들보다 연차가 훨씬 높았고, 이미 그들이 회사에서 느끼는 감정을 초월했기 때문에 묵묵히 들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내 회사 생활은 천국 같고 편한 줄 착각을 했다. 나도 힘든데 왜 이들은 나한테 칭얼거릴까? 내가 목줄을 잡고 그 회사에 입사시키거나 시험 보라고 한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나올까도 고민을 몇 번이나 했었다. 


나이가 들수록 말수가 없어지고, 눈치는 예전보다 늘어서 상대방이 오히려 "괜찮다"라고 하는 눈빛에서 전혀 괜찮지 않음도 느끼게 됐다.


내 자아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이고 내가 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뚜렷하게 목표를 세웠던 적도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돼서 지금의 나는 나와 맞는 상대를 만나기가 더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 Y에게 네 가치를 알아주는 상대를 만나라고 얘기는 했지만, 나조차도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매우 신기한 경험을 했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튀어나왔는지 모를 사람을 만났다. 억지로 들어주는 척하지 않아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그 사람 얘기를 듣고 공감도 했다. 저절로 튀어나오는 웃음과 미소를 참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이제까지 한숨과 고민으로 가득했던 그 공간에서 또 다른 추억의 한 페이지를 썼다. 회사 사람들이 모르는 장소에서 몰래 혼밥 하며 나만의 시간과 여유를 가지던 그 장소만큼은 그 사람과 절대 오지 않으려고 했었다. 한 달에 몇 번이고 다시 와야 할 그 장소에 그 사람과 같이 가게 된다면 앞으로 그곳에서 혼자 밥을 먹기는 힘들어질 거니까... 하지만 역시 뜻대로 되지 않는 내 인생 계획표대로 우리는 그 장소에서 식사를 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퉁이 카페에도 갔다. 내 계획대로였다면 평소 내가 가지 않던 다른 장소에 갔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회사 주변을 도망치듯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10년 넘게 지내왔던 이 장소가 이렇게나 예뻤었구나 라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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