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게 되었다.
화요일과 금요일 오전에 PT를 받고 있다. PT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지속하고 있는 이유는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파서다. 마음이 아프면 일상도 흔들린다. 몸과 마음 그리고 일상을 무너뜨렸던 우울증. 우울감이 진해져 우울증이 되기 전에 몸과 마음을 돌보고 있다. 매일 아침 기도한다.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그렇다고 나만 행복하길 원하는 이기주의자가 아니다.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도 행복하길 소원한다.
7월 18일 화요일. '터키식 프론트 겟업'을 처음 배운 날이었다. 동작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 것 같아 고개를 갸우뚱하던 나에게 대표님이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을 믿으세요!" 이 문장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케틀벨에 집중해야 하는데, 말을 하면 자세가 망가지는데, 말을 안 할 수 없었다. 아이 셋 엄마의 입이 근질근질했다. "대표님, 그 문장이 너무 멋져요." 이 말을 뱉고 나니 아니나 다를까 자세가 흐트러졌다. 자세가 엉망이면 어떤가. 다시 집중하면 된다.
그림을 다시 그리기 전, 공허함을 느끼곤 했다. 왜 공허했을까? 나는 이런 경우에 공허했다. 내가 아닌 타인 또는 환경을 지나치게 신경 썼을 때였다. 학창 시절에는 작은 일에도 친구들과 하하 호호 히히 웃기 바빴다. 어른이 되니 웃을 일이 줄어들었다. 작은 일뿐 아니라 큰일에도 무덤덤해졌다.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니 무료했다. 무료함이 공허로 이어졌다. 무료함과 공허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마디로 기분을 업 시키기 위해서는 외부 자극이 필요했다. 좋은 음식점에도 가보고 명품도 사보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기분 좋은 감정은 금방 사라졌다. 신기루 현상을 원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나를 들여다보았다.
책이나 타인이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자기 객관화를 해야 인생의 지혜가 생긴다.'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렸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객관적인 판단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있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이야기.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만 모르거나, 제일 늦게 아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물론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이런 노력의 축적이 내면의 풍요를 가져오니까. 나는 정신의 풍요가 필요했다. 정신의 풍요가 공허함과 무료함을 사라지게 해 준다고 생각했으니까.
여러 매체에서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 타인도 존중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다. 당연한 말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요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자신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못난 모습을 알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나를 믿기 위해서는 못난 모습에 대한 인정이 필요했다.
옆집 언니가 내가 갖고 싶었던 차를 샀다.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마음은 아니었다. '저 차가 내 차면 좋겠다. 부럽다. 그만 좀 자랑해라.'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찌질했다. 찌질한 나를 보며 이런 말을 했다. 물론 마음속으로.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찌질하다고 자책하지 마. 찌질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어.' 혼자 북도 치고 장구도 쳤다. 심호흡을 한 후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너무 부럽다!"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뱉고 나니까 속이 시원했다. 이 말을 들은 언니는 자랑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어쩌면 언니의 마음이 공허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인정과 관심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몇 번 겪으면서 내면이 풍요로워졌다. 갑자기 내면의 풍요? 잠시 나의 경험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내면이 풍요로워질 수 있었던 과정을 이야기하고 싶다.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 곧 스스로를 알뜰살뜰 챙긴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자기 긍정을 하게 되었다. 자기 긍정이 신뢰로 이어졌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주머니가 가벼워도 만족할 수 있게 되었다.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향락과 멀어졌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시선의 방향이 나에서 남으로 이어졌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인간은 자신만의 고난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부와 지위가 높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단지 부와 지위에 맞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큰 차이는 없다.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인간일 뿐이니까.
살면 살수록 인생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고 듣고 느낀다.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어렵고 경쟁은 심해지고 불쾌한 일들이 늘어난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 친구?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믿고 의지해야 남은 인생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다. 또한 자신을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믿을 수 있다.
나를 믿기 전에는 남도 믿기 힘들었다.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 삶이 뒤죽박죽이었다. 나보다 타인을 더 신뢰했다. 시간이 흐르면 신뢰가 실망으로 변했다. 신뢰할 만한 다른 사람이나 책을 찾아다녔다. 내면에서 '나 좀 봐줘. 신뢰할 사람 여기 있어!'라고 말했지만 듣지 못했고 듣지 않았다. 공허함, 무료함, 허무함이 커졌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나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마음과 생각을 인정하고 흘러가게 두는 경험이 쌓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뢰 점수가 올라간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3년의 세월이 걸린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긴 시간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짧은 시간일 수 있다. 길다고 생각하는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림에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이 담긴다. 자신이 선택한 색, 형태, 구도에 마음과 생각이 녹아있다. 삶이 바빠서 무관심했던 또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과 생각이 그림에 표현되었다. '나를 표현해야지.'라고 다짐을 하거나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마음과 생각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겼다. 중력의 힘으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그림의 힘이 마음과 생각의 흐름을 이끌어 준 것이다. 자신을 믿고 싶은 분들에게 그림 그리는 취미 활동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