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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의 서랍 Mar 17. 2016

hiver '16 . 퐁타니르콩트에서의 첫날

2주간의 프랑스 체류기

퐁타니르콩트(fontenay le comte)에서의 첫날.


아침 여섯 시 반에 일어나서 아이의 밥을 짓는다. 13시간이 넘는 비행으로 예민해져 있을 아이의 장을 생각해서 부드러운 죽을 만들기로 했다. 시어머니가 미리 장을 봐두신 덕분에, 아이는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아침의 첫 식사만큼은 낯설지 않게 되었... 지만, 쌀과 친하지 않은 프랑스 시어머니가 미리 사 놓은 쌀이 꽤 굵은데다 현미처럼 단단한 노란 껍질을 두르고 있어서, 죽을 끓이는 정성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알 것 같은 마음이다. 쌀을 사기위해 남편과 시어머니가 무수히 많은 사진을 문자로 주고받으며 토론을 벌였던 것 같은데... 쌀이 생소한 어머니에겐 최선이었을 거다. 실제로 선택이 쉽지 않으셨던 어머님은 오가닉 숍에서 제일 비싼 쌀을 고르셨단다. 그 마음이 참 감사하다.


- 어머님이 우리 숙소에 미리 준비해 놓으신 식량들

불 위에 죽을 얹어 놓고, 지난밤늦은 도착으로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숙소(Gite)를 찬찬히 둘러보기로 한다. 오래된 3층짜리 집을 리모델링하여 Gite로 꾸미고, 우리 가족을 첫 손님으로 맞이한 이곳은 안락하게 잘 꾸며진 곳이다. 투박한 돌 벽과 하얀 벽이 맞물려 유럽의 느낌을 자아내고 곳곳에 나무 바닥과 소품이 쉬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주방과 연결된 작은 뒷마당에는 아기자기한 나무와 허브들이 심어져 있다. 아직 아무도 마시지 않은, 공기마저 새것 같은 차가운 아침 바람에 나무들이 살랑살랑 흔들거리고, 간간이 작은 새가 날아가다 쉬어가는 뒷마당의 느낌이 참 사랑스럽다. 그런 뒷마당을 바라보며 설거지를 하게 되어 있는 구조인데, 산처럼 쌓인 설거지도 금세 해버릴 것만 같다. 거실에는 멋진 현대식 벽난로의 유리 벽 뒤로 나뭇조각을 태워서 타오르는 불 꽃이 춤을 추고 있다. 바닥을 데워서 공간을 따뜻하게 하는 우리의 온돌 방식보다 확실히 추운 공기를 빠르게 데워주는, 하지만 끄는 순간 공기가 바로 차가워지는, 참 실용적인 놈이다. 벽난로를 바라보며 거실의 한가운데 육중하게 놓여있는 소파는 펼치면 2인용 침대가 되는 놈이어서 아이와 앉아서 놀기가 좋다. 시어머니가 발품을 열심히 팔아서 발견한 집인데, 역시 안목이 있으시다.

일층 거실. 긴장감이 도는 늑대와 순록 :)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소박하고 운치있다.
주방의 이른 새벽


아이의 죽이 다 끓어서 이층에서 자고 있는 남편과 아이를 깨웠다.
이층은 침실인데 보라색을 콘셉트로 잡은 듯하다. 진한 갈색의 나무 바닥에 공단 소재의 진한 보라색 소파와 암막 커튼이 설치되어 있어서, 꼭 연극 무대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니 Gite 주인이 왕년에 잘 나가는 파리의 오페라 댄서였다고 얼핏 들은 것 같다. 오래된 집을 꾸미다 보니 하얀색 돌 벽 중간중간 나무토막이 묻혀있는데, 참 운치 돋는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공간이다. 그런데 맙소사, 침대 바로 옆 욕실에 문짝이 없다. 지난밤 도착해서 문짝 없는 욕실을 보고서 황당한 마음을 눈빛에 담아 남편을 쳐다보았더니, 남편은 껄껄 웃으며 '프렌치 스타일~'하고 쿨하게 한마디 던진다. 나는 프렌치가 아니라서 당신처럼 쿨할 수가 없소!라고 항의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냥 욕실 사용 타이밍에 조금 신경 쓰기로...

이층 침실
이층 붙박이장과 아이 한복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아이와 손잡고 오르락 내리락 무한반복...



시차 때문에 남편과 아이는 지금껏 한 번도 눈 떠보지 못 했던 7시 반이라는 시각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는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평소와 다르게 지내보는 것, 이런 게 또 여행의 즐거움이지.
아이는 별로 뜨겁지도 않은 죽을 후-후- 불어서 참 야무지게도 먹는다. 남편은 고향의 음식이 많이 그리웠나 보다. 원래 아침을 먹지 않는 남편도, 어머님이 채워두신 냉장고를 샅샅이 뒤져서 가져온 소시지, 햄, 치즈를 하나하나 체험하듯 참 야무지게 먹는다. 나는 토스터에 구워진 바삭바삭한 바게트에 버터를 발라 커피와 함께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여기엔 토스터가 없어서 천연 그대로의 질긴 바게트를 내내 먹어야 했다. 그래도 어머님이 사두신 소시 송이 비리지 않고 담백하여 질긴 바게트에 얹어 꽤 많이 먹은 것 같다.

대충 차린 밥상이지만, 눈곱도 떼지 않고 먹는 조식은 언제나 맛있다.
조식 기본템
짜지않고 담백한 소시송



아침 식사를 마친 남편과 아이는 소파에 널브러져 티브이 시청을 했다. IT와 거리가 먼, 오페라 댄서 출신 배경과 상관이 있으려나... TV가 작아도 너무 작아, 19인치 정도 되는 것 같다. 난 처음엔 거실에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는 줄 알았다. 55인치 대화면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IT 강국 한쿡 태생의 29개월 아이에게도 TV로 보일까 싶다. Gite의 리모델링 일정을 우리의 여행 일정에 맞춰 앞당기느라 TV 채널 세팅이 미흡하고 인터넷 세팅이 안되어 있어서, 아이는 대화면 TV 금단현상, 남편과 나는 인터넷 금단현상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밤에 너무 피곤하여 짐도 풀지 않고 침대로 퐁당~했기에, 아침엔 짐들을 정리해야 한다. 짐가방 속 꽉꽉 동여맨 버클을 풀자, 짐 속에서 아이의 빨갛고 노란 한복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설날이라고 친정 엄마가 지어주셨는데, 참 곱다. 한국 시간으로 구정이니 오늘 아침에는 한복을 입혀보자. 옷차림이 바뀌면 행동도 바뀐다고 하더니, 아이는 조심조심 걸음걸이에 손짓이 다소곳해진다. 하하. 유럽풍의 가정집에서 한복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으니, 꼭 스튜디오 사진처럼 나온다. 지금 이 순간 한복을 입고 (살인) 미소를 줄줄 흘리는 아이의 모습을 놓치기 싫어서 휴대폰의 연사 기능을 동원하여 사진을 찍는다. 착착착 사진이 찍히는 소리와 등으로 드러누워 사진에 대한 장인정신을 불태우는 (츄리닝 입은) 엄마 작가의 모습 때문에, 아이는 미소를 멈출 수 없었나 보다.

- 황진이 저리가라~



오전 11시. 똑똑~ 노크 소리. 시부모님이 오셨다. 기다란 바게트 두 덩이를 끌어안고 들어오시는 어머님과 아버님을 보니, 여기가 프랑스가 맞구나 싶다. 아이가 "마미(할머니)~ 빠삐(할아버지)~!!!"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서 반겨준다. 1년이 넘도록 만나지 못한 마미와 빠삐를 기억하고 반겨주는 아이가 참으로 신기하다. 시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그 시절, 아이는 겨우 3개월~13개월의 나이를 지나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만 3세 이전의 양육자는 아이에게 강렬하게 각인되는 듯하다..


여기 퐁타니르콩트는 관광지가 아닌, 그저 평범한 시골이다.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어딘가를 꼭 가봐야 한다는 초조함 없이 여기에 계속 살던 사람처럼 평범한 시간을 보내며 작은 프랑스를 느껴보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점심을 먹고 어머님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동네를 잠깐 걸었다. 남편이 유년 시절을 보낸 이곳을 걷고 있으니, 왠지 골목의 끝에서 빨간 머리의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남편의 초등학생 버전이 튀어나와 말을 걸 것만 같다.
이곳은 과거에 굉장히 역동적인 (부자) 도시였다고 하는데, 이제는 젊은 사람들이 모두 대도시로 떠나버려서 꽤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거나 비어있었다. 다소 허전한 느낌은 들지만, 그래도 아주 오래된 도시여서 건물들이 운치 있고, 골목의 느낌이 참 정겨운 곳이다.

동네 산책




오후에는 2주 동안 지내는데 필요한 생필품을 사기 위해 대형마트에 갔다. 마트 안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에너지를 잠시 충전하려는데, 우리를 힐끗힐끗 바라보는 시선들과 나의 시선이 마구 부딪혔다. 그렇다... 여기는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에 나 같은 동양 여자를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다. 남편은 프랑스에서 나의 밸류를 더 느낀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말을 했다. 칭찬 같아서 확인차 "what do you mean?"이라고 하니까, 남편은 대답 대신 나를 그냥 꼭 안아주었다. 아이 낳고 2년간 꾸준하게 괴물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다행히 아직 사랑이 식지는 않았나보다.

- 마트 안 카페에서. 정말 맛있는 커피 네 잔과 샌드위치 두 개가 겨우 만 오천 원 정도...

- 시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저녁식사. (좌) 애피타이저 (우) 메인. 소시지와 콩 샐러드


퐁타니르콩트에서의 첫날이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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