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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Jun 03. 2019

그들이 어딘가에 살고 있다

<기생충>을 보고

인간을 기생충이라고 하다니,

같은 종에게 가장 잔인하다는 인간은 결국 이지경까지 왔는가.


하지만 이 표현은 한국에서만큼은 그닥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층 계급의 삶을 기생충에 빗대어 표현한 진부한 영화 제목은

그들의 삶을 감각으로 느끼기 전에는

클리셰에 불과했다.(적어도 나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왜 그들의 삶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TV에서 대만 카스테라 전문점 파동이 일어났을 때

기자는 열심히 부도덕성을 얘기했고,

특종을 하듯 먹거리 집을 파헤치는 르포 기자는 정의감에 불탔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토는 간결하다.

경쟁을 해라, 너의 우월성을 증명하라, 그러면 너에게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과 노력과 자본은 한계를 가진다.

실패는 모두 개인의 부도덕성, 무능력에 귀인한다.


봉준호가 플란더스의 개에서 한 노숙자의 삶을 얘기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궁금해 했다.

인간은 한번 태어나면, 그가 가진 육체를 담아줄 집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진 순간에도 그는 어디선가 몸을 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쉽게 잊었다.


무엇인가 광풍이 불면, 집이 날아가고, 가재도구만 챙겨서 떠나야 하는 광경은

6 25적 이야기가 아니다.


무생물인 기업이 살고자 구조조정을 하면

무능한 가장들이 먼저 우수수 떨어진다.

다행히 그들 손에 약간의 자본이 쥐어져 있다.

기업의 윤리는 딱 거기까지이다.

그 돈으로 알아서 가게를 차리지만,

미디어에서 도덕성으로 무장한 50분짜리 르포 하나면

요식 업계의 한 업종이 와르르 무너지는 교조적인 사회 분위기.  

취재하던 기자는 과연 자기 손으로 카스테라 흰자 거품을 한번 쳐봤을까.

거짓말보다 더 나쁜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만족시킬 수 없는 가혹한 계율들이다.

가혹한 계율을 산 사람을 매장시킨다.

보이는 세계에서 추방당한 그들이 살기 위해 끊임없이 내려갔던 그 곳.

하수구가 역류하고, 햇빛이 들어오는 창으로 먼지와 오물이 나뒹구는 집.

그 집에서 사는 봉준호의 가족에는 희한하게도

아버지를 개무시하는 자녀가 없다. (그들이 근사한 학력을 가지지 못해서일까? 사다리가 없어서?)


하지만 내가 만나는 무수한 내담자들은 어린 시절 무능했던 아버지를 미워하느라

기를 쓰고 성공한 후에도 자신의 삶을 제물로 삼는다.


한국 사회가 정직해지고, 성숙해지려면,

지하에 숨겨놓은 무능한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산 사람을 매장시켜 놓고 잊은 우리가

박사장처럼 모르고 저지른 무례함을 반성한다.

나역시 유능한 사람만을 너무 사랑해왔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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