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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Jan 07. 2022

죽음이란 무엇일까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드라이브 마이카 보고 왔다.

우선 러닝 타임 2시간 59분. 예술 영화관 아니면 못 올리는 상영 시간이다.

영화 전체에 체홉의 바냐 아저씨 대사가 마치 주인공의 내면의 알레고리처럼  흐른다. 얼마나 절묘하게 배치를 해놓았는지 그것은 복선이면서 메아리이기도 했다. 또 아무 고통도 없다는 듯이 버티는 가후쿠가  미치지 않게 도와주는 심리 치료 장면 같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만 절대 하나일 수 없기에 각자의 심연은 섹스로도 이야기로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두 주인공도 그랬다. 그들은 천사 같은 딸을 5살 때 여의고 16년이 지나도록 신혼인양 사랑하고 배려하고 이야기한다.

어느날 주인공은 사랑하는 아내와 진한 키스를 하고 출장을 떠났다. 출발 직전에 비행 시간이 하루 연기되자 급하게 집에 돌아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게 된다. 그 장면을 보고 그는 뒤돌아 공항 호텔로 가고 몇 시간 뒤 아내늩  아무 일도 없는 것 처럼 영상통화를 건다. 그가 목격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아내는 지극히 그를 사랑한다. 극본을 쓰는 아내는 섹스 후엔 매번 어떤 상상의 줄거리를 이어 가는데, 짝사랑하는 남학생 집에 몰래 침입해 아무도 모를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이야기다. 어느날 섹스의 집중하지 못하는 남편과 달리 격렬한 절정을 느낀 그녀는 왠지 외도를 목격한 남편 자신을 떠오르게 하는 발각이 임박한 타이밍에서 멈춘다. 그리고 돌연 스토리 속 주인공이 기생을 거부하고 돌에 붙어 사는 고귀한 칠성장어가 전생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할말이 있으니 일찍 오라는 그날, 아내는 죽는다. 밤늦게 들어간 집안에는 아내가 쓰러져있었고 지주막하출혈이었다. .
<영화의 시작 자막이 그제서야 올라간다>

 배우인 가후쿠는 연습을 위해 자신의 역을 뺀 대본 전체를 차에선 아내의 목소리로 녹음해서 늘 듣고다닌다. 아내의 외도를 알기 전에도, 후에도 죽은 후에도 여전히. 대사의 그 연극을 연극제에서 올리기 위해 그는 히로시마에 체류하여 연기자들을 뽑고 연습을 한다. 모두들 그가 주인공인 바냐 아저씨를 할 줄 알았지만 그는 오디션에 온 아내의 외도 상대를 무리하게 주인공에 캐스팅한다.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다.

배경이 되는 히로시마는 당연히 죽음에 대한 강렬한 은유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장면들이 교차되면서 죽음은 풍성한 의미를 갖는다.
쓰레기 더미에서 자라 거짓말과 참말을 금방 안다는 운전수는 히로시마에서 볼만한 데를 안내하라는 주인공을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데려간다. 부스러져 눈처럼 보이는 쓰레기. 저건 다 뭘까. 화면은 아름답지 않은 쓰레기를 오래 비춘다. 물질의 최후일까? 아니 상대에게 가서 닿지 못한 우리들의 말일까? 차라리 우리들 자신일까? 무의미가 소멸하듯 거대한 소각로 안에서 쓰레기는 전소된다.  마치 화장장처럼. 우리 존재처럼. 시간과 함께 사라진 사랑의 언어처럼.

독특한 연습방식을 고수하는 연극은 공연도 특별하게 진행된다. 마치 바벨탑의 인간들처럼 중국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 수어까지 각기 다른 언어로 연기한다. 어쩌면 같은 언어를 써도 어차피 당신들은 귀기울여 듣지 않잖아, 상대의 다른 나라 말을 다 듣고 있어?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 불통은 수없이 반복된 연습을 통해 배우들 간이 길이 트이고 결국 그 절정은 언어가 아닌것의 전달로 상장된다. 농아 배우의 연기 장면은 알아들을 수 없는 수어가 진정으로 주인공과 관객에게 희망을 전달한다. 어쩌면 우리는 마음을 사로 주고 받지 못하면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르리. 그러니 언어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온마음을 다해 말하고 들으면 대단한 무엇이기도 하다고.


13살부터 술집에서 일하는 엄마를 라이드하기 위해 맞으면서 최상의 운전실력을 쌓게 된 운전수와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주인공은 자신의 아픔을 말하게 된다. 두 인물의 대화는 그 장면은 억지스러울 정도로 아팠다.

내가 아내를 살릴 수 있었는데 죽였다.

저는 엄마를 죽였어요.

서로를 지옥에서 그래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죄책감을 선택한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건 우리가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우린 뭐라도 하고 싶어서 괴로움을 선택한다.

눈에 쌓인 완파된 운전수의 집 앞에서 가후쿠는 제대로 상처받기 싫어 피해 다닌 시간을 말하고 그동안 버려둔 자신을 돌보기 시작한다. 내 보살핌을 기다리던 자신의 마음을.


살아있다는 건 늘 움직이므로 언제든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어느날 원폭이 투하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다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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