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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May 28. 2020

<바람의 언덕>을 보고

지인의 영화평을 듣고 언젠가 극장에서 보리라 생각했다. 빔 밴더스 영화제에서 바람의 언덕도 상영한다고 해서 호기롭게 스케쥴러 올려놨지만, 근무가 끝나고 가볍게 영화를 보러 갈 수 있는 인생이 아니다. 아마 그런 인생도 쓸쓸하긴 비슷하겠지만.


 영화에는 이쁘지도 못나지도 않은 그래서 더 소름끼치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 나왔다. 이런 영화가 너무 좋다. 이것이 이야기인지 그냥 삶인지 분간이 어렵다. 사실주의가 이렇게 추구될 때 우리는 건너가고 흘려보낸 내 삶의 어떤 부분들에 머무르도록 추동된다.


 화면이 그려낸 정분이의 맑은 얼굴에 놀랐다. 화장안하고 눈썹 문신도 없는 중년 여인의 얼굴.  고운 느낌과 다르지만 처연하고 아름답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모든 과정에서 아름다움이 출현할 수 있다. 이전에 모르던 이 아름다움은 상실을 전제로 한다. 모텔의 작은 안내창 너머를 들여다 보거나 택시 운전수에게 나를 보라고 눈짓을 보내거나 빈 환자 침상을 쓰다듬으며 독백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사는 세상은 별로 아름답지 않다. 어디고 못생긴 철구조물이 있다. 철로 만든 침상, 고향의 다리 난간, 모텔의 흉측한 섀시, 가게 선반까지 모두 쇠구조물이었다. 편리하고 썩지 않고 빠르게 척척 공사할 수 있는 소재. 두 모녀가 움직이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이 소재가 빠지질 않았다. 우리의 남루한 일상은 이렇게 흉하고 뻔떡대고 차가운 소재로 되어있다. 부드럽고 얄팍하 인간의 살갗이 기댈 수 없는 곳. 이것은 우리 주인공들의 강퍅한 삶의 모습과 일치한다.


 그녀의 삶이 물화된 가장 먹먹한 장면은 영화 중반에 등장한다. 영분이 딸 한희 학원의 전단지를 들고 가다가 커다락 시멘트 벽을 발견하고서다.

 화면 가득 찬 시멘트 벽.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조차 안되는 거대한 그 벽 앞에서 영분은 기운차게 둔턱을 올라 전단지를 붙이기 시작한다. 꽤 오랜 테이크 장면인데 여기서 나는 가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때로 어떤 이에게는 과거가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되곤한다. 엄혹하고 차가운 거대한 벽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까. 장벽을 뛰어 넘고 무너뜨리라고 말하던 지난 시대의 거대 담론은 이 현실 앞에서 무용하다. 우리가 만든 과오는 긴 시간 동안 죄책감의 타르로 단단한 공그리가 되었다. 이 앞에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여러 번 결혼을 하고 실패하고도 두려움 없는 정분은 벽보를 붙이고 두 손을 모은다. 사랑은 그렇게 무모하고 나이브하다.그리고 처참한 진실을 마주할 때 사랑의 철없음은 힘이 된다.


 두 배우가 해야할 말을 모두 해버린 영화의 절정 장면에서 정분은 전혀 다른 얼굴이 된다. 두려움 없이 천진하던 그녀는 딸이 밉다고 울부짖는다. 이 장면은 타인의 마음을 읽고 품위있게 행동하면서도 생기를 잃지 않았던 정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래서 정말 진실로 느껴졌다.

 사랑하라는 정언 명령은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핍투성이었을 딸이 정분에게 사랑을 말해준다. 그건 배워서 아는 건 아니지만 경험하면 잊을 수 없다. 한희는 정분을 달랜다. 아무리 사랑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도 돌아오면 된다고. 마음이 아픈 걸 누군가를 비난하는 걸로 돌리지 말라고. 일어난 일들이 아무리 끔찍해도 지금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고.

 

 엄마가 된다는 건 숫제 관용어다. 그건 사랑을 배운다는 뜻이다. 남자여도 어린 아이여도 삶에서 우리는 모두가 엄마가 되는 과정 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과오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내 죄의 통곡의 벽 앞에서 누군가를 위해 비는 것. 그렇게 하늘을 찌르는 벽을 우리는 넘어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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