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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Aug 14. 2017

영화<아가씨>를 보고

언제적 영화인가.

화제작을 뒤늦게 보고 게으른 감상문을 올려본다.


이상하게도 영화를 잘 못 골라 봤을 때 남들보다 더 후회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화제가 되는 영화 앞에서는 누구보다 신중하게 되고,

영화를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저렇게 수집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인상깊은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아직 안봤어? 그냥 봐봐."라든지,

"레즈비언 영화야"라는 얼버무림이 대부분이었다.

조금 솔직한 어느 여교수님은 "저에게 관음적 성향이 있음을 발견했어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젊은 남자아이인 아들은 "역겨웠다."고 표현했다.


박찬욱 영화가 그렇다.

<박쥐>가 나왔을 때는 내가 가톨릭 소공동체에서 열일하던 때였는데,

소재가 소재인지라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선 문제작이 되었고, 혹자는 보지도 않고 광분했다.

박찬욱이란 영화 감독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처음 올드 보이를 봤을 때 나를 가장 불편하게 한 것은

근친상간을 한 오누이의 성애 장면이었다.

구체적이고 변태적이면서 몹시 불편했다. (그런데 성적으로는 흥분이 되도록 구성했다)


<아가씨>는 그런 점에서 몹시 탁월하게 불편한 영화이다.

주로 여성 간의 성애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상영시간의 상당 부분 할애했다.


물론 나도 불편하고 머릿 속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여자의 몸은 나에게는 익숙한 것이지만, 여자와 여자의 사랑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처럼 황홀한 환타지나

감성의 세계로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불편하고 흥분되었다.

이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다.

내 감각과 감정과 생각이 일치될 때 우리는 만족감을 느끼는데

그가 묘사하는 성애 장면들은 매순간 쾌락의 세계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불편함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지점이 이 영화를 '진정한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랑은 누가 하는 것인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 사랑인가?

에로스를 말할 때만 남녀를 대입하는 것이 아니다.

하다 못해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거룩한 모성에 관한 이미지에서조차 우리는

엄마와 아들을 설정한다.

(그래서 성애 장면 중간에 숙희가 히테코에게 젖을 먹이고 싶다는 대사는 매우 상징적이다. 모든 사랑은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에게로 환원된다.)


영화를 보다 눈물이 울컥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바로 숙희가 히테코가 오랫동안

낭독회에서 남자들의 음란한 상상의 노리개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분노하며 욕하고, 책을 찢고, 난도질 하는 장면이다.


그때 히데코의 표정을 보았는가?

히데코는 고운 옷을 입고 새장에 갇힌 창녀같은 여자였을 뿐이다.

그녀의 삶은 자기애적인 남자들의 자위 환타지에 고이 제물로 바쳐진 여자일 뿐이다.

음욕과 물욕이 만난 현장에서 부가가치를 생산해내는 도구일 뿐이었다.

그런 가식과 거짓을 단번에 알아보고, 화를 내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학대 당한 여자를 위해 화를 내고 같이 탈출해주려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녀들이 사랑하기 위해 페니스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음란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에서

어쩌면 사랑은 서로를 아끼고 귀히 여기며,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을 표현하는 육체적인 몸짓과 어루만짐이 모두 사랑이라는 가정에

우리도 모르게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성기의 결합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이어야 한다는

어리석은 신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 질문한다.


그래서 급진적이고 불편한 이 영화는

터무니 없이 사랑의 행위에도 정상과 비정상을 금방 구분해내려는 성기중심주의적인 나의 해묵은 고정관념을 시원하게 리셋해주었다.

(그런데 베드신에서 두 여배우의 표정은 얼마나 자유로왔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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