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는 한파를 견디기 위해 온몸에 힘을 꾹 주기 때문에
나는 2.3킬로의 미숙아로 태어났다. 몸 상태가 심각하게 나빠 백일까지는 다른 아이들처럼 커가는 징후가 없었고, 돌이 지난 후에야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생일마저 12월 말이어서 동갑인 아이들보다 성장이 두 배로 늦은 셈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걱정했다. “너는 다른 아이들보다 항상 늦어.”
그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정말로 나는 모든 면에서 느렸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남들은 수월하게 하는 것 같이 보이는 일들이 내겐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초등학교 저학년이 되도록 종종 바지에 오줌을 쌌고 구구단은 6학년이 돼서야 가까스로 다 외웠으며 중학교 1학년 때는 영어 시간에 ‘Birthday’를 못 읽어 선생님이 반 아이들 앞에서 화를 내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엄마 말대로 친구들보다 한 살 늦게 시작한 셈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머리가 나쁜 거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람들 말을 잘 이해 못 해 자주 되물었다. 누군가 내게 질문을 하면 대답할 말이 입속으로만 맴돌았다. 대충 얼버무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때야 대답하면 좋았을 말들이 떠올랐다. 대본 쓰듯이 노트에 그런 경우 대답할 말을 적고 소리 내 읽곤 했다.
책을 많이 읽기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책은 읽다가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앞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끝까지 읽은 후 여러 번 읽을 수도 있었다. 세상의 속도는 버거웠지만, 책은 유일하게 내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는 곳이었다. 책은 빨리 대답하라고 재촉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바로 하는 걸 왜 너는 빨리 못하느냐고 짜증 내지도 않았다. 나는 목적 없이 읽는 행위, 그 자체를 순수하게 즐겼다.
쉬는 시간에도, 주말에도, 항상 책을 읽었다. 책을 열심히 읽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도 되었다. 교내뿐 아니라 전국 단위의 백일장에 나가서 상을 타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람들은 나에게 기대를 했다. 책을 읽거나 글 쓰는 것을 보고 어른들이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작가가 꿈인가 보구나.” 내 꿈이 작가였던가?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것도 같았다.
작가가 되려면 지금까지의 독서로는 안 될 것 같아 세계 몇 대 명작, 무슨 대학교 추천도서, 논술용 추천도서, 신춘문예 등단작… 이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좋은 문장을 베껴 쓰기도 하고, 전보다 더 많이 읽었다. 이후로도 교외 백일장에 꾸준히 나가 상을 받아왔다. 하지만 한 번도 최우수상(1위 상)은 받지 못했다. 대개 장려상. 잘해봤자 우수상, 이런 식이었다. 어딜 가든 천재는 있기 마련이고 그 사이 나는 어정쩡했다. 상을 받아 와도 어른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듯했다. “쟤는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는다면서 왜 저것밖에 못 해?”
한동안 책 읽는 것을 숨겼다. 열심히 하는데 못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안 해서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나았다. 그즈음 이런 말들도 알았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 ‘책을 읽기 전과 후가 같다면 그 독서는 헛된 것이다.’ 아, 책 읽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구나! 이상한 일이다. 그 반성 이후 책을 전처럼 많이, 즐겁게 읽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누군가에게 어떤 경험이 효과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에게 해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오래 걸렸다.
모든 경험이 다 극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도 참 많이 돌아왔다.
생각의 계기는 콩나물이었다. 콩나물을 키워본 사람은 알 텐데, 콩나물은 일반 화분처럼 물이 빠지는 구멍이 작지 않아 이 물을 주는 게 도대체 소용이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주는 물이 바로 다 빠져버린다. 안 그래도 미심쩍은데 그 위에 어두운 천을 덮어놓아 크는 게 바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 스쳐 가는 것 같은 물을 세네 시간에 한 번씩 주기도 해야 하니 비효율적이고 번거롭다. 그런데 며칠 후 덮은 천을 들치면, 콩나물이 쑥 자라있다. 그렇게 크는 콩나물을 보면서 나도 콩나물 같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속도가 당장 나지 않더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 오래 기다렸을 때만 나오는 선물 같은 것이 있다는 걸 믿는 것은 시금치에서 배웠다. 언젠가 겨울 시금치에 함유된 비타민 C는 여름 시금치의 3배나 되고, 겨울 시금치의 당도도 아주 높다는 글을 읽었다. 그래서 겨울에 나는 채소 중엔 시금치가 왕이라는 것이다. 이유가 뭐지? 궁금해서 검색했더니 이런 말이 나왔다.
“시금치는 한파를 견디기 위해서 온몸에 힘을 꾹 주기 때문에 당도가 올라가게 됩니다.”
이 글이 나이브한 낙관주의처럼 보일 수도 있다. ‘참아라’는 식으로 들릴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오래 망설였지만, 취업에 실패한 후 ‘전 왜 살아야 할까요?’ 같은 걸 자꾸 물어오는 대학생 독자나 후배들 때문에 나는 용기를 낸다. 자. 나는 세상이 얼마나 엉망이든 견디란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누군가 남들의 사례들을 대며 너도 견디라고 할 때, 내 개별성과 고유한 속도를 주장하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만이라도 자신 스스로를 믿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저 담대한 겨울의 시금치와 한밤의 콩나물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