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이 최근 청룡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영상을 찾아봤어요. 화면 속에서 감독은 매우 상기되어 있었어요. 긴장한 탓에 다소 장황하게 느껴지는 수상소감을 들으며 최근 몇 년간 그가 겪었을 롤러코스터를 떠올렸습니다.
전작 ‘군함도’로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이고 흥행에도 실패하며 마음고생이 심했을 감독. ‘군함도’를 만들기 직전에는 ‘베테랑’으로 천만 영화를 만들어 찬사 받은 감독. 절치부심해 해외 올로케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코로나 시국을 만나 영화관 개봉 자체가 불확실해진 상황을 맞이한 감독. 거리두기 4단계 속에서 극장 개봉을 강행했고 결국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을 넘긴 ‘모가디슈’의 감독. 그 모든 상황들을 겪은 후 시상식 무대에 선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는데 오늘은 좋은 때인 것 같습니다. 사실 진짜 제가 뭐라도 된 것처럼 들뜨는 순간도 있었고 제 경력이 끝장날 정도로 위기로 보이는 순간도 있었어요. 근데 어떻게 묵묵히 버티고 가니까 이렇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뭔가 답답해서 안 뚫리고 어둠 속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영화인들, 조금만 잘 버티시죠. 버티시면 좋은 날 옵니다.”
‘버티시면 좋은 날 옵니다’라고 말하는 감독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수없이 스스로에게 그 말을 해주어야 했을 거라 느꼈습니다. 결국 우리가 남에게 행하는 조언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비슷한 상황에서 자기라도 자기를 믿어주려고 다짐하던 문장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 2014년 출간된 책 <데뷔의 순간>에서도 그는 버티는 마음에 대해 말한 적 있습니다. “겁먹지 않는 태도를 키워야 한다. 챔피언은 잘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잘 맞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는데 오늘은 좋은 날이라고 말하는 감독을 보며 저는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생각했어요. 크리스마스는 모두에게 특별한 날이지만 제겐 조금 더 특별해요. 제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거든요. 결혼한 이후 생일은 집에서 보내는데요, 혼잡한 걸 싫어해서 외식은 23일쯤에 미리 하고 당일에는 산타 장식이 없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와 달달한 빌라 엠 와인을 먹으며 집에서 쉬어요. 그간 생일이면 당연하게 산타나 루돌프가 올라간 케이크를 먹어왔습니다. 그러다 수년 전 남편에게 크리스마스 장식이 없는 케이크를 받았는데 특별해진 기분이 들더라고요. 이후로는 단순한 디자인의 케이크를 미리 주문해둔답니다.
산타가 없는 크리스마스 케이크 외에도 이맘때면 챙기는 게 또 있어요. 주말마다 뱅쇼를 가득 만들어요. 뱅쇼의 장점은 실패하기가 더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든 성공이 예정된 먹거리는 많지 않으니까요. 비슷하게 쉬운 게 있다면 라면 정도? 뱅쇼는 고급 재료도 필요 없고 눈대중으로 하는데도 언제나 맛있어요.
한 병에 오천 원 넘지 않는 와인을 여러 개 사서 큰 냄비 안에 콸콸 부어 넣고 검지 손가락만 한 시나몬 스틱 하나와 사과 하나, 껍질 깐 귤 대여섯 개를 넣은 뒤 뭉근하게 끓입니다. 다른 과일은 패스해도 되지만 만감류는 꼭 넣어주세요. 그럴 리 없지만 마지막에 맛을 봤는데 애매하다면 설탕이나 꿀을 한 스푼 넣으면 무조건 괜찮아져요. 그렇게 사골국처럼 끓여둔 뱅쇼를 자기 전에 홀짝홀짝 마시고 있으면 몸이 서서히 데워지며 기분 좋게 나른 해집니다. 뱅쇼를 끓일 때마다 온 집 안이 달달한 향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도 덤이지요.
지금이야 이렇게 여유를 부리지만 이십 대 중반까지만 해도 12월은 내내 정신없이 일한 기억으로 가득해요. 여러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시급이 높은 편이고 주말 위주로 일할 수 있어 학업과 병행하기 좋았기에 대학 시절 내내 꾸준히 했어요.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지만 이천 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피자헛, 빕스, 베니건스, TGIF, 아웃백 등의 인기는 대단했죠. 가족이나 연인끼리 생일 파티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요청을 받으면 동료 아르바이트생 한 두 명을 더 모아 축하송을 불러주곤 했어요. 케이크 모양으로 생긴 모자나 고깔모자를 쓰고 탬버린이나 장난감 기타로 박자를 맞춰 신나게 노래를 불러준 뒤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선물했지요.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모든 직원과 아르바이트생이 총출동해도 밀려드는 손님들을 감당하기 어려웠어요. 대부분의 손님들이 케이크를 하나씩 들고 와서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죠. 뒤로 넘겨 묶은 뒤에 고정해둔 머리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매니저 언니가 와서 핀을 다시 꽂으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런 날에는 너나할 것 없이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어요. 정신없이 일한 뒤 유니폼을 벗어두고 퇴근하는 밤이면 자주 서글퍼지곤 했어요. 이게 내 인생의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면 어쩌지?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 뒤에서 박수 쳐주는 사람이기만 하면 어떡하지?
내 인생에서조차 주인공이 되지 못할 거라는 예감 때문에 두려워했어요. 그때 또 간절히 바랐었죠. 생일에 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고. 그걸 원하던 20대 초반의 저를 만나면 말해주고 싶어요. 소원이 진짜로 이루어졌다고. 30대가 된 너는 원했던 대로 크리스마스를 바쁘지 않게 보내게 될 거라고. (원했던 소설가는 못되었지만 그런 이야긴 굳이 해줄 필요 없겠죠) 만약 그때로 돌아가 이 말을 해줄 수 있다면 그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까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을까요? 아마도 전자일 것 같네요. 어차피 안 믿을 테니 머리나 한 번 더 쓰다듬어주고 오겠어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의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이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영화 속에서 감독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런 메시지를 던집니다. 원하던 어른이 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그저 지금을 받아들이고 삶의 소중함을 이해한다면 태풍이 지나간 후의 풍경처럼 어느덧 변할 수도 있다고. 저 또한 바라던 걸 다 이루진 못했지만 ‘생일에 바쁘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다’ 등 몇 가지는 이루었어요. 그렇다면 남은 소원들도 어쩌면 이루어질 수 있겠죠.
이제 편지를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메리 크리스마스. 서러워하지 마시고 걱정은 다음으로 미뤄두시고 일단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올해 크리스마스를 원하던 모습으로 보내지 못한다 해도, 괜찮아요. 우리에겐 수많은 다음들이 남아있으니까요. 버티다 보면 좋은 때도 온답니다. 가능하면 일단 오늘은 좋은 날인 걸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