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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하지 않겠다는 다짐

습관 : 더 이상 다짐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

by 정문정


사진: Unsplash의Justin Morgan



“전 요즘 아침마다 생각해요. 운동 좀 줄이자. 오늘은 하루에 딱 두 시간만 하자.”


둘러앉은 사람 사이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사전에 지정한 책을 함께 읽고 그 책의 주제와 관련된 에세이를 써와 합평하는 월간 모임에서였다. 모임장으로 이번에 추천한 책은 박상영 소설가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였는데 이 에세이는 작가가 다이어트를 결심한 이래 꾸준히 폭식과 야식을 반복하는 실패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좋은 에세이는 결국 실수와 좌절에 관한 이야기라고 믿는 내가 종종 추천하는 책이다.


우리는 한 명씩 돌아가며 책 읽은 소감을 나눈 뒤에 최근 어떤 다짐을 가장 많이 했는지에 대해 말했다. 이직, 영어 공부, 독서량 늘리기, 휴대폰 사용 시간 줄이기처럼 공감되는 이야기가 이어져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다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머뭇거리며 운동을 덜 할 거란 다짐을 발표하니 감탄과 웃음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그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여성만이 심각했다. “저도 비슷한 말을 하려고 했어요. 요즘 너무 마라톤을 많이 해서 그만 신청하자고 다짐하거든요.”


내가 진행을 이어갔다.


“너무 흥미롭게 들리네요. 전 단 한 번도 운동을 덜 하자는 생각을 해본 적 없어요. 제게 있어서 운동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다짐은 언제나 ‘하자’ 일뿐이죠. 그런데 여기 계신 두 분은 운동 시간을 줄이자는 다짐을 하시네요.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죠. 이분들이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운동을 하는 지를요. 어떤 다짐은 그 사람의 상태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다짐의 반대는 습관 같기도 해요. 다짐은 자주 생각하지만 못 하는 거고, 습관은 생각 없이 그냥 하는 거니까요. 루틴이 필요한 진짜 이유는 행동을 습관으로 만들어서 더 이상 다짐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로 가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자, 이제 질문을 바꿔볼게요. 전에는 자주 다짐했지만 이제는 하지 않는 게 있나요?”


차례대로 입을 여는 사람들을 보며 지나온 다짐들을 떠올렸다. 스무 살이 되면서는 부모 원망 말자고 매일 다짐했었다. 이제 성인이니 부모 탓을 그만해야 한다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오십만 원을 들고 나와 창문 없는 고시원 방을 얻었다.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이나 사랑을 받는 친구들과의 격차가 거대하게 느껴져 절망스러울 때마다 혼잣말을 했으나 돌이켜보니 이십 대 중반까지 부모에 대한 글을 제일 많이 썼다. 마음이 남아서 미워도 했다.


삼십 대 초반엔 건강하자고 다짐했다. 아침에 수영을 한 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저녁에는 재활 치료를 받았다. 매운 음식과 술과 커피를 끊었다. 교통사고를 당해 네 달간 입원해 있던 대학병원에서 퇴원한 직후였다. 앞으로 계속 절뚝거리게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그 해, 발끝에 힘을 주고 필사적으로 걸었다. 똑바로 걷자. 제대로 걷자. 회사를 휴직한 뒤 과자보다 약을 더 많이 먹던 시기여서 건강에 집착했다. 그땐 건강에 관련된 정보만 귀에 착 들러붙었다. 몸에 나쁘다고 하면 먹고 싶어도 꾹 참았다. 요즘은 마라탕 빼고 다 먹는다.


최근에는 무슨 다짐을 제일 많이 하느냐면, ‘너무 애쓰지 말자’고 되뇐다. 식탁에 앉아 이 문장을 쓰고 있는 내 눈앞에 마그네슘 영양제가 쌓여 있다. 심해진 불면과 불안 증세를 약사인 친구에게 상담했더니 퇴적층 같은 내 어깨를 만져보고 만성피로와 습관성 긴장이 있는 사람에게 효과가 있다고 추천해 준 것이다. 행여 약이 부족하거나 값이 오를까 봐 한 번에 네 박스를 사다 놓는다. 액상 영양제라 무거워서 낑낑거리며 들고 온다. 약도 애써 사고 있다.


얼마 전,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요즘 너무 무리하고 안달복달하는 것 같아서 엄마한테 전화해서 하소연을 했어. 그랬더니 엄마가 이래. ‘딸, 너무 열심히 살지 마.’ 그 전화를 끊고 한참을 웃었어. 난 우리 엄마만큼 매사에 고군분투하는 사람을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봤는데.”


이래서 조언 같은 걸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 특히 성공한 사람의 후회 같은 것. 후배의 현재진행형 고민에 대해 선배들은 자꾸 자신이 포기하고 미뤄둔 것 위주로 대답하므로 그럴 의도 없이도 기만적이기 쉽다. 나도 요즘 아끼는 동생들을 만나면 너무 애쓰지 말라고 한다.


벌써 연말이 다가왔다. 노트북 바탕화면 메모장에 적힌 올해의 계획과 내년의 계획이 나를 쏘아본다. 다짐 없이도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다. 다짐을 줄여봐야지. 아. 방금 또 다짐을 했다.




[한겨레신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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