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관식, 박정민, 후덕죽의 공통점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간절한 것

by 정문정


칠십 대 할아버지를 덕질 중이다. 눈이 반짝거리고 미소가 아름다운 그의 이름은 바로 후덕죽(어쩜 이름조차 후덕일까?). ‘흑백요리사 2’에 출연한 후덕죽 셰프는 후덕한 면모를 드러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중식업계 58년 차의 전설적 인물이지만 메인 요리가 아닌 참외 버무리는 일에 솔선수범하고, 후배가 자신의 중식도를 가져다가 마늘을 다지는 데 쓰는데도 “잘 쓰는 데 뭘”하면서 허허 웃는 모습이 강렬했다. 그의 넓은 아량에 반한 사람이 나뿐만 아니어서, 그의 대인배적 마인드는 ‘후덕죽식 사고’로 불리며 사랑받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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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함. 최근 히트한 영상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공통점이다. ‘왈가닥–포용자’ 캐릭터의 관계성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어른의 판타지를 적극 활용하는 대중문화 콘텐츠, 특히 로맨스 영역에서 여자 주인공은 원하는 것을 위해 좌충우돌하고 남자 주인공은 상대가 하고 싶은 걸 하도록 격려하며 지켜본다. 대표적인 것이 ‘폭싹 속았수다’ 속 애순이와 관식이다.


영화로 나왔다면 천만 관객을 동원했을 영상도 있다. 맨발로 노래하고 춤추는 화사를 지켜보던 박정민이 구두를 가져다주고, 그 구두를 화사가 던져버리는 것조차 박정민이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걸로 설정한 무대는 2025년 청룡 영화제 최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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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생인 내가 보면서 자란 90년대의 영상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희생자–구원자’의 관계가 많았다. 특히 여주인공은 가난하지만 씩씩하며 희생적이다. 원하는 것이 있더라도 가족이나 회사, 친구를 위해 보류하거나 포기한다. 개인의 행복보다 공동체의 안녕이 여전히 더 중요하던 때였으므로. 그의 희생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딱 한 사람, 남자 주인공만은 그의 희생을 알아본다.


드라마의 예를 들면 ‘사랑은 그대 품 안에’ ‘토마토’ ‘별은 내 가슴에’ 등이 그러했다. 십 대이던 나는 그런 콘텐츠를 보며 확신했다. 참으면 누군가가 꼭 알아봐 줄 거라고. 복은 참는 자에게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고.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한국인의 그러한 믿음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헌신하면 헌신짝 되고, 묵묵히 있으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나갔다. 구원자는 오지 않으니 스스로 구원해야 했다. 어떻게? 안주하지 않고 실력을 쌓아서.


2000년대 이후 콘텐츠에는 ‘능력자–조력자’ 관계가 주로 등장했다. 의사나 변호사가 등장하는 전문직 드라마도 이 시기부터 쏟아져 나왔다. ‘허준’ ‘대장금’ ‘하얀 거탑’ ‘비밀의 숲’처럼 주인공은 상처와 결핍이 있으나 뛰어난 능력이 있다. 능력자가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그 옆에서 보조하는 캐릭터가 주인공의 상대역이었다.


‘노력’이라는 단어가 꼰대의 언어가 돼버린 후로는 성장의 과정을 건너뛴 캐릭터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선천적인 능력이 압도적이라 시련 없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는 주인공을 보며 사람들은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느꼈다. 그러나 이처럼 완성형 주인공이 등장하는 세계에서는 특별한 관계성을 찾을 수 없다. 나머지는 주인공의 활약을 빛내주는 소모품으로만 쓰이니까.


희생자 주인공의 대표적 고난이 ‘배신’이라면 성장형 주인공이 두려워하는 것은 ‘포기’이고 최강자 주인공 세계관에서의 최악은 ‘실패’뿐이다.


그렇다면 요즘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뭘까? 양관식, 박정민, 후덕죽을 보며 갈망하는 게 포용성이라는 걸 뒤집어 본다면, 지금의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건 ‘고립’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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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개인화의 시대,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다시 관계와 연결에서 답을 찾고 있다. 위선조차 떨지 않는 혐오가 만연해지고 국제 관계에서도 힘의 논리만이 강하게 작동되는 시절의 반작용일 것이다. 2026년을 예측하는 트렌드 리포트에서는 공통적으로 ‘인간다움’ ‘감정 회복’을 핵심 단어로 뽑았다. ‘다정’이라는 키워드 검색량은 최근 2년 동안 두 배 이상 늘어났고 출판계에서는 다정함을 키워드로 한 책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지도교수님과 면담을 하다가 막바지에 이런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한계를 규정하지 마세요. 내 제자들은 다 할 수 있어. 하면 되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여러 번 곱씹었다. 어떤 말은 듣고 나서야 사실 내가 그 말을 간절히 찾아다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 뒤로 한동안 가족과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너는 엄청 잘될 사람이야” 같은 말을 뿌리고 다녔다. 내가 듣고 좋았던 말은 남에게도 통할 때가 많으니까. 이런 건 요즘 들어 특히 더 귀한 것 같다. “난 네 편이야” “마음껏 해 봐”처럼 믿어주고 품어주는 언어 말이다.




[한겨레신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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