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세계를 보았다. 김무성 의원이 선보인 ‘노 룩 패스’ 캐리어 이야기다. 그가 공항으로 입국하며 수행원에게 캐리어를 밀어 보낸 영상이 화제였다. 김무성 의원을 본 수행원은 고개 숙여 인사했지만 김 의원은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으며 그쪽으로 가방을 굴려 보냈다. 수많은 카메라가 있었지만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작은 연기조차 할 필요를 못 느꼈을 정도로 김무성 의원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후 그 논란을 해명하라는 요청을 받자 “그게 왜 문제가 되냐? 바쁜 시간에 쓸데없는 일 가지고···”라고 응수했다.
영상이 검색어 상위에 오르며 논란이 됐던 건, 아마 숙였던 고개를 들자마자 황급히 가방을 잡아내던 수행원의 모습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맛, 모멸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설명하는 모멸감의 뜻은 “업신여김과 깔봄을 당하여 느끼는 수치스러운 느낌”이다. 김찬호 교수의 책 『모멸감』을 보면, 자신의 결핍과 공허를 채우기 위해 한국인이 가장 많이 취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남에 대한 모멸이라고 한다. 위계를 만들어 누군가를 무시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 또한 김무성 의원의 캐리어 영상을 반복해서 보았다. 그러다 좀 슬퍼졌는데, 수행원의 모습에서 잊었던 모욕들을 환기해냈기 때문이었다.
습관처럼 내가 잘못한 일들을 곱씹던 밤이 있었다. 터벅터벅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어도 밖에서 묻혀온 부정적인 말들은 잘 털어지지 않았다. 대학 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말이면 영화관이나 호프집, 패밀리레스토랑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에겐 긴장된 일터가 손님들에겐 서비스를 받으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힐링의 장소였다. 끝없이 친절과 웃음을 요구 받는 것이 버거워서 그만두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출근할 때면 걸리적거리는 자존감을 작게 접어서 집에 뒀는데, 너무 자주 숨겨두다 보니까 정작 필요할 때 잊어버려서 못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리가 나쁘니까 이런 데서 일하지”와 같은 손님의 말뿐 아니었다. 이상한 말들은 도처에 있었다. 대학 때 사귀던 연상의 남자친구는 “넌 여자가 기가 너무 세서 문제야”라고 말했다. 수업 하던 중간에 “여자들은 이기적이라 기업이 싫어한다”고 한 교수도 있었다. 덩치 큰 여자 후배가 치마를 입고 온 날, 남자 선배가 낄낄대며 말했다. “이야~ 너 용기 있다!” 이처럼 편견에 찌든 말, 고압적인 말, 폭력적인 말들은 나를 쪼그라들게 했다. 물론 그중엔 악의 없이 단지 농담이었을 뿐인 말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이상한 사람들의 말에 나름의 대처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무례한 사람들은 내가 반응하지 않은 것에 용기를 얻어 다음에도 비슷한 행동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에서 만나는 다음 사람들에게도 용인 받(았다고 생각하는)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또한 나는 그런 말에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패배감을 쌓아갔고, 그렇게 모인 좌절감은 약자를 만났을 때 전달되기도 했다. 갑질의 낙수 효과였다.
모두에게 친절한 것이 능사가 아니란 건 한 기업에서도 증명했다. “성희롱이나 폭언을 하는 고객에게 2차례 경고한 후 그치지 않으면 상담원이 먼저 전화를 끊어라.” 2012년 현대카드가 전화 상담 직원에게 내린 지침이다. 지난해부터는 폭언·성희롱 외에도 인격모독이나 위협적 발언을 하는 고객의 전화도 끊을 수 있게 했다. 이 ‘엔딩 폴리시’를 시행한 결과 상담원의 이직률이 크게 낮아졌다. 폭언하는 고객 또한 마찬가지다. 상담을 중단하겠다는 경고만 해도 당황하며 태도를 바꾸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무례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하는 엔딩 폴리시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문제가 되는 발언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편견이 심한 말을 들었을 때, 흥분하지 않고 ‘제3자가 듣는다면 오해하겠는데요?’라고 말하거나 ‘당사자가 들으면 상처 받겠네요’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대한 감정을 싣지 않으며 말하는 것이다. 나 또한 젠더 감수성 없는 농담을 했다가 후배가 웃으며 “선배, 그러다 감옥 가요”라고 해서 반성한 적이 있다. 우리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이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자유롭다. 그 선을 누군가 넘었을 때 경고하는 것은 언어폭력에 대처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두 번째는 되물어서 상황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 못 한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되물으면 더욱 좋다. 예를 들어 누군가 농담이라며 ‘저 사람은 얼굴이 참 이타적이네’라고 한다면 ‘아, 저 사람이 못생겼다는 뜻이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물어보면 상대는 순간적으로 머쓱해하며 표현을 다시 점검할 것이다.
세 번째는 상대가 사용한 부적절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해 들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영감탱이는 욕이 아니라 친근한 표현이라서 썼다’고 한다면, ‘앞으로 영감탱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하고 응수할 수 있다. 상대가 사용한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돌려줄 수도 있다. “가슴이 작은데 왜 브래지어를 해?” 하고 묻는 남편에게 “그럼 오빠는 왜 팬티 입어?” 했다는 농담처럼 이상한 논리로 상대를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역지사지를 경험하게 할 필요가 있다.
네 번째는 무성의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육아 전문가들은 아이에게 여러 번 설명했음에도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떼를 쓴다면 달래주지 말라고 조언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만 보거나,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도 방법이라고 한다. 지지 받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아이가 이 상황을 스스로 판단해서 멈추게끔 하는 것인데 이 원리는 어른에게도 유효하다. 메신저로 벗어나고 싶은 상황을 마주한다면 “ㅎㅎ” 또는 “그러쿤” 정도로 답해 대화를 중단시킬 수 있다. 실제로 만난 상황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넹~” 정도의 표현만 의도적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이상한 사람을 보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가정에서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사회생활을 통해 상호작용하면서도 배운다. 무례한 사람들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회사에서 대표인 사람이 집에서나 친구를 만날 때조차 대표처럼 행동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어느 순간 옷이 자기의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서 그의 행동을 제지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자 자신이 옳다는 용기를 주입 받기 시작했고, 걷잡을 수 없이 무례함이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그렇게 풍선처럼 높이 떠오르자 모든 사람이 그의 발아래에 있게 되었다.
누구나 어떤 관계에서 갑질을 할 수 있다. 나 또한 가끔 후배들과 이야기를 하다 내 말이 다 옳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가끔 후배들의 얼굴에서 내가 그 나이 때 상처 받았던 표정을 발견할 때도 있다. 남편에게 그런 이야길 하면 이런 답을 들어 현타가 온다. “너 그러다 진짜로 감옥 가겠는데?” 요즘은 일부러 무언가를 배우거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며 여러 상태에 나를 놓아두려고 한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하는 노력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서로 제지시킬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갑질’ ‘개저씨’ 같은 한국어가 수출되는 사회에서, 누구든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 장려될 때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문화가 우리의 유산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부당함을 더는 참지 않기로 거부하는 것,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이런 것이라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지금껏 세상은 그렇게 진보해왔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