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박완서는 40세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을 통해 <나목>이라는 소설로 데뷔했다. 소설은 그가 전쟁 중 미군 부대 초상화부에서 만난 화가 박수근에 대한 내용이다.
<나목>을 뽑아준 심사위원들은 그를 칭찬하면서도 공통적으로 ‘일회적인 작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작가가 특수한 자기 경험을 형상화했기 때문에 첫 책이 마지막 책이 되고야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박완서 작가의 시상식 때는 그를 뽑아준 심사위원들이 오지 않았다. 자신을 뽑아준 선배 문인으로부터 직접 따뜻한 말을 기대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실망스러웠다고 작가는 훗날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에 썼다.
박완서 작가는 등단할 당시 들었던 불길한 예언들을 상기하면서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지 불안해했다고 한다. 실제로 등단 후에도 한동안 원고 청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썼다.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등을 냈고 단편집으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을 내며 왕성히 활동했다.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중산층의 삶과 여성으로서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그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2011년 박완서 작가는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됐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아 한국의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별명을 가진 김연수 작가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그는 1994년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 3회 작가세계 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첫 작품을 낸 뒤 그를 대상으로 한 첫 평론을 받아들게 되는데 그 평론의 제목은 ‘단명의 예감’이었다.
그가 얼마나 더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개그가 보고 싶으면 읽으라는 식의 무자비한 평론이었다. 심지어 첫 책에 대한 평론은 그것이 유일했다.
김연수 작가는 실망했지만 그만 두지 않았다. 그는 훗날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잘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작품만큼이나 그 작품을 쓰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여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어서, 김연수 작가의 글을 보며 ‘단명의 예감’을 했다는 평론가는 더 이상 평론을 쓰지 않는다.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예언하기를 좋아한다. 주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정에서든, 친구들에게든, 회사에서든 “너는 ~한 사람이야” “너는 ~할 것 같아”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그런 말들을 자꾸 듣다 보면 믿어버리는 것이다. 자기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고.
“이 결혼, 해도 될까요?” “저 공무원 시험 쳐도 될까요?” 같은 질문을 접할 때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남에게 묻는 걸 보니 하지 않겠구나’라고.
흔들리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평가나 조언을 거대하게 받아들인다. 확신있는 사람은 남에게 물을 시간에 그 일을 이미 하고 있다.
일상에서 무례한 사람이 평가하는 말을 듣게 된다면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겨버려라.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하면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그는 나를 잘 모를뿐더러 나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지도 않았다. 몇 년 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세요?” 하고 묻는다면 분명 기억하지도 못할 말을 곱씹고 있는 것이 억울하지 않은가?
나의 과정을 모두 아는 사람은 나뿐이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려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다짐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하게 두고, 나는 나의 일을 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