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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Aug 26. 2015

인간은 '미생'이 아니라 '현재진행'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나를 '현재진행형'이라고 믿을 수 밖에


나도 이력서를 쓸 때가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의 이력서를 본다.  올해부터는 파트장(편집장) 직함을 달게 되어 같이 일할 사람을 살펴볼 일이 더 생겼다. 후배 에디터도 뽑고 인턴도 뽑고 등등. 지난 에디터 공채때는 서류, 필기, 면접, 합숙면접의 4단계를 모두 준비한 적도 있다. 


아시다시피 채용 과정은 지난하고 잔인하다. 대기업이 아닌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 수백 명의 사람이 떨어지고 단 몇 명의 사람이 붙는다. 떨어지는 사람도 상처가 남겠지만 떨어트리는 사람도 트라우마가 생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너무 크게 개입해버렸다. 어휴, 공덕은 못 쌓아도 업보는 안 쌓으려고 했는데….


특히 죄책감이 드는 건, 객관식이 아니고 사람이 하는 일이라 채점이 정확할 수 없어서다. 서류의 경우 자소서점수가 10점 만점에 8점까지만 서류 통과가 되는 거라면 10점과 5점으로 매긴 갭은 채점자가 설명할 수 있고, 대부분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9점과 8점은? 당락을 가르는 8점과 7점도 마찬가지다.


서류에 통과해 면접에 들어와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또 누구나 자신의 과거에 비추어 생긴 행동의 가이드라인이 있다. 이걸 편견이라고도 한다. 당연히 한 명을 여러 명이 보고서도 의견이 다 다르다. 얘는 되고 얘는 이래서 안 되고, 얘는 뽑아봤자 나갈 것 같고….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리스크를 최대한 줄여야 하고 심사위원 입장에서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그 책임을 모두 질 것을 걱정할 수밖에 없으므로 상대적으로 무난한 친구가 유리한 경우가 많다. 심사관 네 명에게 AA와 DD를 받은 친구보다는 심사관 네 명에게 BBBB를 받은 친구가 합격할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A와 B의 차이에 확실한 이유가 없는 것도 물론이다.



이제부턴 좀 창피한 고백이 될 것 같다. 전형을 진행하면서 너무 많이 사람들에 대해 말했다. 한정된 자료만으로 평가 절하하고 쉽게 예측했다. 겨우 이십대 중반, 많아 봤자 이십대 후반인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 친구는 이게 한계일 것 같아요.” “우리 일보다는 다른 일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지 않나요?” 대개 이런 식이었다. 직원들과 이런 말을 하면서 그러니 누구는 붙이고 누구는 떨어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원자들의 자소서를 다 채점하고서, 나는 예전에 자소서를 어떻게 썼는지 궁금해 메일함을 뒤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24살의 나는 참 별로였다. 슈퍼스타 K 뺨치는 구구절절 사연팔이에 오만함이 섞여서 재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이 자소서를 봤다면 별로 좋은 점수를 안 줬을 게 분명했다. 그 상태로 어찌어찌 운이 좋아서 면접까지 왔다면 나는 돌려보내고 이렇게 말했을 것 같았다. “저 친구는 누구랑 같이 일하기에 좋은 타입은 아니네요.”


자랑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나는 그때보다 많이 달라졌다. 협업 능력이 더 생기고 전문 영역이 생겼다. 물론 자세한 건 임직원들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하지만 어차피 앞에서는 대충 좋게 말해주지 않을까요?) 일을 못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때는 자의식 세고 촌스러운 학생이었다.하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다방면에서 훈련을 하며 날로 바뀌었다. 그 순간순간에는 변화를 나조차 몰랐지만 지나고 나니 알겠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이런 모습이 될 줄은 날 심사하던 분들도 굳이 예측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배우면 잘 할 수 있다는 건 의심하지 않았다. 좋은 회사라면 내 가능성을 봐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렇게 오만했던 것이다. 나는 진행형의 사람이니까. 그런데 정작 나는 남에 대해서 완료형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토익이 칠백대… 성실하게 일할 스타일은 아닐 것 같은데” “기획안이 너무 무난해, 이 사람이 뭘 더 할 수 있겠어?”


물귀신 작전을 쓰자면, 주변에서 이런 판단을 많이 봐왔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비판은 대부분 이런 방식이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사람들의 공통점 같기도 한데, 경험과 시간으로 갖게 된 자신의 장점이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것인 줄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남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단언한다. 숙련자와 초심자, 아버지와 아들의 힘겨루기처럼 결국 시간이 바꿔놓을 것들에 대해서 교만해버리는 것이다.


자꾸만 매년 지원자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직원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경력이 쌓여서 더 많이 보게 됐지만, 지원자들은 다들 처음인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보면 매년 사람들의 상태가 나빠진다고 말하는 게 진짜 맞는 걸까요?”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취준생으로서 괴로움 속을 헤엄치고 있다면, 그건 당신의 가능성을 못 본 면접관들이 병신이거나 운이 조금 안 따라준 것일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누군가에게 재능이 없다고 평가받아 하고 싶었던 일을 잠시 미뤄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도 이 말이 가닿았으면 좋겠다.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거나 실력을 더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딘가에 거절당했다고 해서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현재진행형의 사람들이고 10년 전의 내가 지금 나를 상상할 수 없었듯 물처럼 바뀔 거니까.


넣는 곳마다 떨어져 “네가 창피하다”는 소리를 어머니에게 듣고 울던 한 친구는 지금 한국 최고 광고 대행사에서 일하는 중이며, 면접관에게 “아무래도 기자할 성격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은 한 친구는 지금 신문사에서 바쁘게 일한다. 취업이 되지 않아 드럽고 치사해서 아예 창업을 택했는데, 이게 또 대박이 난 경우도 있다. 어찌됐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나를 믿어야지 별 수 없다. 취준생 여러분. 어디서든 무엇이 되어서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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