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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Jul 29. 2015

바보 같아도, 취향  

영화 <족구왕>에서 나만의 취향을 떠올리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족구... 좋아합니다

영화 <족구왕>에 나오는 대사다. 재치있고 발랄한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홍만섭은 토익 성적도 여친도 없는 순결한 몸으로 제대한 복학생이다. 캠퍼스의 낭만을 꿈에 안고 돌아와 보니 학교에 족구장이 사라졌다. 선배들과 동기들은 모두 공무원이나 토익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복도에서 족구를 하다 공부에 방해된다고 욕먹고 족구장을 다시 만들어달라고 총장에게 건의하다가 족구 하는 소리하고 있다고 욕을 배불리 먹는다. 그러던 그가 캠퍼스 족구대회에 나가게 된다는 이야기.


영화에서 만섭이 짝사랑 중인 안나는 그가 족구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 애인 사귀고 싶으면 어디 가서 족구 좋아한다고 말하지 마요. 여자들이 족구 하는 복학생 제일 싫어하는 거 몰라요? 어휴. 심지어 이름도 그래, 족구가 뭐야 조오옥구?” 


만섭이 잠시 침묵했다. 나는 만섭이 차마 족구를 배신할 순 없고 연애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어서 그냥 조용히 찌그러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만섭은 심호흡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본 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 대사가 자꾸 떠올랐다. 나는 만섭처럼 말할 수 없는데. 그동안 사람들 앞에서 취향이라고 말해온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내 취향은 진짜 나의 취향인가? 그저 남에게 멋진 취향으로 보일 것 같은 취향을 취향이라고 믿어오지는 않았던가? 내가 좋은 것에 대해서 좋다고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이미 평가해놓은 것을 조심스럽게 확인해두지는 않았나?


나도 만섭이같은 상황이었던 적 있다. 지금은 같은 회사에 다니지 않는 선배가 물었다. “어떤 작가 좋아해요?” 별 고민없이 곧바로 떠오르는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김00 김00 이00요” 선배가 말했다. 


“문정씨 취향 알 만하네요.” 


헐;. 그리고 다음 달 선배가 낸 기획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김00 와 김00 읽고, 기껏해야 이00 읽는 사람들을 계몽시키는 게 목적입니다.” 헐;;. 곧 그 말은 내 친구들 사이 에서 누가 뭘 한다는 말만 하면 “네 남자 취향 알만하다” “기껏 한다는 게 그거니?” 하는 식으로 서로 놀릴 때 쓰는 유행어가 되었다.



취향을 통한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구별 짓기’ 같은 이론을 설명할 것도 없이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취향은 대개 그의 경제적 수준과 성장 환경까지 예측게 한다는 걸. 취향은 그가 속한 계층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골프가 취미인 50대와 등산이 취미인 50대는 다르며 아이돌 음악을 듣는 20대와 재즈를 듣는 20대는 다르다. 또 취향은,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멋진 친구를 따라 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고방식이나 말투를 흉내 내기도 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된다. 하루키를 좋아해 그처럼 일상적으로 달리고 맥주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을 나는 수없이 봐왔다.


취향은 집단의 생활 양식이 되기도 한다. 90년대 한국의 국민 취미는 ‘음악 감상’과 ‘독서’였다. 인기 가수의 음반이 백만 장씩 팔리고 다들 집에 전집 하나쯤 갖추는 게 일반적이던 때다. 그때 나는 매일 책을 읽었는데, 모두들 취미를 독서라고 하니 나도 독서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 부끄러웠다. 남들이 나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볼까 두려워서. 요즘은 국민취미가 ‘영화 감상’ ‘인터넷’ 또는 ‘게임’, ‘여행’ 정도로 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여행작가를 만나면 이 사람은 여행이 취미라 하기 민망하겠구나 생각하며 속으로 웃곤 한다. 전엔 “저 책 안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더니 요즘은 “전 여행 안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기 쉽지 않다.


취향이 사실은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다만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일 뿐이라면, 그건 일기를 검사받는 것과 뭐가 다를까. 내가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표현하고 남들의 취향에 대해서도 무시하지 않아야 세상은 여러 색으로 다양해질 수 있을 테다. 그러려면 내가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한다고 따라하는 걸 줄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그전에 서로 ‘취존(취향 존중)’도!


임성한 작가의 <신기생뎐> 중, 눈에서 레이저 나오는 희대의 막장 장면ㅋ


내 친구 K는 임성한 작가의 팬이다. 출연자를 막무가내로 죽이고 황당하게 귀신이 나오기도 하는게 재밌단다. 특히 그의 드라마를 보면 딸기는 칫솔로 씻는 게 좋고 비듬에는 계란 흰자로 머리를 감는 게 효과 있다는 식의 생활정보를 많이 알 수 있는데, 이런 팁을 대사에 넣기로는 김수현 작가도 못지않지만 김 작가가 “이런 것도 있지만, 난 이렇게 하는 게 좋더라”는 식으로 수다 같은 정보를 준다면 임 작가는 “닥치고 내 말 들어. 내 말이 진리니까”라는 식으로 말해 웬만한 개그보다 웃기다고 했다. 처음에는 나도 “네 드라마 취향 알만하다”, “기껏 좋아하는 게 임성한이니?”하고 놀렸지만, 자꾸 친구의 임성한 예찬을 듣다보니 그렇다면 그것도 나름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처럼 당당히 자기 취향을 밝히는 사람은 멋지다. 소설가 박민규는 ‘한국 작가들이 꼽은 내 인생의 책’이라는 캠페인에서 다른 작가들이 고전이나 시집 등 근엄한 작품을 말할 때 혼자 포르노 잡지 <허슬러>를 꼽았다. 그는 그 이유로 “나는 이 책을 통해 읽기의 즐거움을 알았고 골똘히, 집중해서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질 수 있었다. 그전의 나는 책을 펴면 잠부터 몰려오는 소년이었다.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허슬러> 덕분이다”라고 썼다. 그는 덧붙였다. 


“톨스토이를 읽었지만 그래도 ‘엉덩이’를 좋아하는 나를, 맑스에 심취한 건 심취한 거고 ‘가슴’을 좋아하는 나를, 그 ‘어쩔 수 없는’ 나란 인간을 이 책은 늘 잔인할 정도로 상기하고 상기하게 만들어준다. ‘허슬러’를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어쩔 수 없는 존재란 사실을. 실은 어쩔 수 없어, 인간은 철학을 만들고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안나는 족구 하는 만섭이와 헤어진 후 전직 축구선수 출신의 벤츠를 모는 썸남을 찾아간다. 그런데 사실 그 남자는 기름값도 없고 고시원비도 밀린 상태라 집밖에 나오지 않고 있는 중이다. 쪽팔려서 나가지 않겠다는 남자에게 안나는 이렇게 소리친다. 


“다른 사람들 눈이 그렇게 중요해? 만섭이는 병신같아도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잖아!” 


만섭이를 놀리던 사람들이 족구를 같이 하는 걸로 끝나는 ‘족구왕’은 그처럼 병신같아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끝까지 하는 사람이 자기 인생의 진짜 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 좀 병신같으면 또 어떤가 말이다. 그거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갖길 원하는 ‘나만의 개성’이 아니던가?


#족구왕 #꿀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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