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정문정 Feb 26. 2021

오늘만 살지 말고 내일도, 내년에도 살아 있어야지

오늘만 사는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


Photo by Lawrence Hookham on Unsplash



살면서 제일 죽음 가까이에 있던 날은 서른을 앞둔 12월의 밤이었다. 대구에서 출발한 고속도로 위에서 양재에 가까워진 걸 보며 거의 다 왔다고 긴장을 풀던 그때, 옆에서 운전하던 이가 어, 어 하면서 핸들을 확 틀었다.


쾅! 하는 소리와 코를 찌르던 매캐한 냄새. 후에 들으니 졸음운전을 하던 뒤차가 내가 타고 있던 차를 밀어버렸다고 한다.


그뒤는 자세히 생각나지 않는다.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고 응급실에 실려가자마자 저녁에 먹은 걸 다 토했던 일, 내부 출혈이 심해 급히 수술에 들어가겠다고 설명하던 의사 목소리.


방광이 파열되고 발목과 골반이 골절되었고 왼쪽 다리에 신경손상 소견이 있어 뼈가 붙고도 제대로 걸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내 이름으로 전치 20주의 진단서가 나왔다.


중앙대병원에서 한 달간 응급 수술을 두 차례 끝낸 뒤에도 부러진 골반 때문에 꼼짝하지 못했다. 기저귀와 소변줄에 의지해 대소변을 받아냈고 엉덩이 골에는 욕창이 생겨 악취가 났다.


이때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존심이 얼마나 연약한 기반 위에 있는지 알게 됐다.


사설 구급차를 불러 경희대병원으로 옮겼는데 여기는 한의대로 유명한 곳답게 한방과 양방 협진을 한다고 해서 재활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많이 간다고 했다.


병원을 옮기고는 어느 정도 나아 조금씩 몸을 움직이게 되었고 드디어 휠체어를 타는 데 성공한 날엔 조각 케이크를 먹으며 남자친구와 기쁨을 나눴다.


4인실 안에서 두 달 넘게 머무르는 동안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고 나갔다. 병명은 제각기 달랐으나 대부분 머리가 짧고 뽀글거리며 주말이면 손주가 부모와 함께 병문안을 오는 나이대 사람들이었다. 평일 아침에는 무조건 <아침마당>을 보고 일요일이면 반드시 <전국노래자랑>을 트는 이들.


나처럼 휠체어를 타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이십대인 사람은 더더욱 보기 어려웠다. 가끔 내 또래로 보이거나 나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을 마주치면 여기 오게 된 사연이 궁금해졌다.


굳이 내가 먼저 묻지 않아도 병원 안은 소문이 빨랐다. 침대 위 시트를 탁탁 쳐가며 주름 없이 깔고 환자식에 밥 한 공기를 추가해 냉장고에 넣어둔 반찬을 꺼내 먹는 모습이 노련해 보였던 간병인 아주머니들이 어색한 한국어 억양으로 병원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의 사연을 말해주곤 했다.


내 또래면서 휠체어를 타는 이들은 대부분 교통사고가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이들의 상태를 설명할 때 꼭 보험사와 관련한 설명이 들어갔다. 상태가 이렇게 나빠질지 모르고 너무 빨리 합의를 해줬다고, 합의금 받은 것은 이미 다 썼고 치료비가 앞으로 얼마가 더 들어야 하는지 모른다고.


목을 가누지 못하거나 오래 걷지 않아서 다리가 팔목처럼 얇아진 이들과, 그를 돌보는 보호자들의 머리칼은 희끗했고 어깨가 굽어 있었다.


가해자가 가입한 자동차 보험회사의 직원이 병원에 방문했다. 사고 내신 분이 굉장히 죄송해하고 있으며 쾌유를 빈다고 전해달라고 했다며 인사하고 명함을 주고 갔다. 곧 다시 연락을 드릴 테니 치료에 전념하라는 말을 남기면서.


사과에도 아웃소싱을 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이면이라는 생각에 화가 나려다 그저 우스워졌다.


점차 진통제에 의지하지 않게 되며 정신이 맑아졌고 재활치료에 전념하면서 휠체어에서 목발로 옮겼다. 경희대 캠퍼스에 벚꽃이 흐드러지던 즈음엔 절뚝거리며 손과 발이 동시에 나가는 식이긴 했지만 드디어 두 발로 서게 됐다.


네 달간의 병실 생활을 정리하자 곧바로 보험사 직원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2000만 원을 제시하면서 최대한으로 정한 비용이니 합의하자며 남아 있는 치료를 받고도 충분할 거라고 했다. 지금 말고 나중에 하면 금액이 오히려 적어질 수도 있다고 설득하려 하기에 더 들을 것도 없다며 거절했다.


퇴원만 했을 뿐이지 아직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고 치료를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성급하게 종결할 수 없었다. 천천히 치료를 더 받고, 합의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되면 먼저 연락을 드리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같은 해 겨울이 되자 처음 찾아왔던 직원이 아닌 더 높은 직급의 직원에게 연락이 왔고 다음해에는 부장이라는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시간을 끌수록 그들에게 불리해지는 시스템임이 분명했다.


여전히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퇴원 후에도 계속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았고, 이 경우 합의금을 얼마나 받는 것이 최선인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고가 난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뒤는 내가 어떻게든 바꿔볼 수 있는 일이니까.


남자친구가 관련 용례를 찾는 데 도움을 주었고 함께 손해사정사와 변호사를 찾아가 유료 상담을 받았다. 알고 보니 합의금이라는 것은 계산이 복잡했다. 단순히 상해 정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연봉 같은 요소도 고려해 손해금을 합산하는 식이었다.


우리가 모은 자료에 의하면 합의금은 내 경우 4000만 원이 최선이었다. 이 금액에 대한 말은 쏙 빼고, 우리가 알아본 내용들을 미팅 전 레포트 수준으로 정리해 보냈다. 기준 이하 금액을 제시하면 소송까지 낼 생각이었다.


마주앉은 직원은 보험금으로 내가 생각한 비용 이상을 제안했고, 오케이를 하자마자 곧바로 통장에 50,000,000이라는 숫자가 찍혔다.



Photo by Matthew Waring on Unsplash



이때의 협상 경험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십대 초반의 나였다면 처음 보험사 직원을 만났을 때 2000만 원이라는 금액을 듣고 바로 합의를 했을 것 같다. 아니, 분명히 했다.


더 알아볼 것도 없이, 지금이 아니면 이 돈마저 놓칠 거라 생각했겠지. 후유증이 나타날지 확실치 않을뿐더러 나타나더라도 나중 일이지만 돈을 받는 건 당장의 일이니까.


왜 이십대 초반에는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고 지금은 그때와 달라진 걸까. 그동안 내가 갑자기 똑똑해졌나? 신중해졌나?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결국 이 선택을 가른 건 ‘예비비’의 유무였다. 당시 나는 직장 생활을 오 년 넘게 한 상태여서 당장 월급이 들어오지 않아도 이 년 이상 버틸 수 있는 돈이 있었다. 그랬기에 교통사고가 나고 휴직을 한 상태에서도 급할 게 없다고 배짱을 부릴 수 있었던 거다.


살다보면 어떤 난관에 부딪히게 되고 그럴 때는 누구든 패닉에 빠져 시야가 좁아진다. 이때 필요한 도구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와 정보력(전문가나 주변인의 도움)인데, 이것은 일단 당장의 생활비 걱정이 없어야 가능하다.


여유가 없어 다급해진, 절박함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그 어떤 이와의 파워게임에서도 진다.


이 사실을 깨닫자 전에 가졌던 의문이 풀렸다. 왜 그렇게 내 주변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장학금 같은 정보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더 알아보지도 않고 가깝고 학비가 저렴한 대학에 입학했는지,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취업이 되지 않으면 일단 어디든 어떤 조건으로든 입사하거나 결혼해버리는 여성이 많았는지……


그후 나는 책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Poor Economics』를 읽다가 가난하게 살아간다는 건 정보에 접근할 기회가 적다는 것을 의미하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실(예컨대 예방접종을 하면 홍역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대목과, 가난하면 내일보다 오늘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기에 목표까지 가지 못하고 자포자기하게 되며, 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는 글에 밑줄을 그었다.


회사 생활을 할 때 나는 후배들이 일단 쉬고 싶어 퇴사를 생각한다고 면담을 청해오면 꼭 이 질문을 했다.


“재취업이 바로 되지 않아도 일 년 정도는 버틸 돈이 있니?”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우선 그 돈부터 모으고 다시 생각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모아둔 걸 퇴사 후 해외여행을 가는 데 다 써버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간당간당한 생활비에 쫓겨 전 직장보다 훨씬 못한 곳으로 가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예비비가 있으면 화각이 넓어지고 그렇게 되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까지 아울러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사회초년생이라면 일단 1000만 원부터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보자. 목돈이라고 생각되는 단위의 숫자를 통장에 한번 찍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처음이 어렵지 일단 그렇게 되면 돈 모으는 데 재미를 붙일 수 있어서 천만 원을 만드는 과정보다 1000만 원에서 3000만 원을 만드는 과정이 더 쉽다.


이런 루틴이 빈곤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임을 알고 있기에 정부에서는 기준 소득 이하의 청년을 대상으로 저축 금액만큼 지원하는 ‘희망두배 청년통장’ 같은 복지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오늘만 사는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건 차분함을 기르는 연습이 아니라 잔고에 쫓기지 않는 환경부터 구축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는 이유가 정말 현명하지 못해서만은 아니다.



이전 09화 이 일만 하는 사람은 아니야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더 좋은 곳으로 가자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