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문정 Feb 25. 2021

회사 인간이 아니라도 살 수 있을까

회사원으로 살지만 회사 바깥이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면


Photo by Matt Hoffman on Unsplash




원하던 회사로부터 최종 거절 메일을 받았을 때 연극의 한 장면처럼 주변이 암전되었다. 만화의 한 장면처럼 느낌표가 가득 찍힌 뾰족뾰족 말풍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리를 구부리고 누워서 오래오래 흐느꼈던 기억. 그렇게나 입사가 간절했던 때가 있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났을 때도 회사 때문에 울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세수하다 눈물이 터졌는데 남편이 들으면 걱정할까봐 욕조에 물을 받으며 통곡했다. 안방과 화장실이 바로 붙어 있는 집이라 그래봤자 다 들렸나보다. 태연한 척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남편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발개진 눈을 보더니 그가 말했다.

“너무 힘들면 퇴사도 생각해봐.”


퇴사? 퇴사라고? 내가 퇴사할 수 있을까?


퇴사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새삼 생소하게 들렸다. 초등학교에서 육년을 보내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각각 삼년을 보낸 뒤 대학에 진학하고 또 졸업한다. 의지로 택하지 않아도 끝이 예정된 세계와 달리 직장은 헤어지는 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잊고 있었다.


소속과 직업으로 나를 표현하는 것에 익숙했고 연차가 쌓이며 자신감도 한창 올랐을 때였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승진하며 연봉이 오를 때,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이유가 아니어도 갖고 싶은 걸 결제할 때 행복했다.


그런 건 가짜 행복이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많은데 글쎄, 돌이켜봐도 그 당시 최초의 그 성취감들은 진짜였다.


입사 전까지는 스스로를 부유하는 부레옥잠 정도로 느꼈다. 기존에 속한 곳들은 벗어나고만 싶은 곳이어서 이방인처럼 맴돌았다. 고향이 싫어서 탈출하기만을 꿈꾼 뒤에 마침내 도착한 서울. 외로웠으나 정규직으로서의 소속감만은 유일하게 달달했다. 마음 깊이 회사에 충성을 여러 번 맹세했었다.


서울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까지 하게 되고는 드디어 여기에 뿌리내리게 됐구나 싶어 안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퇴사를 한다고? 아등바등 고생해서 그나마 이만큼 왔는데, 또다시 바닥으로 내려가지는 않을까?


내가 처음으로 퇴사를 생각하게 된 즈음에는 마침 ‘퇴사’라는 키워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었다. ‘퇴사학교’ 같은 곳이 생겨나고 퇴사와 관련된 책이 여럿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안정적인 직장을 뛰쳐나온 이들을 다룬 방송이 화제가 되었다.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영혼이 망가지는 걸 느낀 청년이 사직서를 내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이 퇴사한 이들을 조명할 때 주로 쓰이는 내러티브였다. 주변에서도 퇴사하는 이들의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여기만 아니면 어디라도 괜찮을 것 같아서’ 퇴사하고 여행부터 간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그뒤의 스토리는 잘 들려오지 않았다. 


몇십 년간 없던 자아가 퇴사  단번에 찾아지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자아를 찾았다 쳐도 시간이 지난 후엔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질문에 상당 부분 답이 되어준 건 저널리스트 출신 이나가키 에미코가 쓴 책 『퇴사하겠습니다』였다. 그는 자유를 찾고 싶어 십 년간 퇴사를 준비했고 마침내 목표를 이루었다.


그의 책은 퇴사를 독려하는 책이 아니라, 회사 밖에는 어떤 풍경이 있는지 현실적으로 알려주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게끔 했다. 직장이 없으면 신용카드 한 장 만들기 어렵다는 걸 이 책으로 처음 알았다.


작가는 말했다. 회사는 나를 만들어가는 곳이지 의존하는 곳이 아니라고. 회사원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퇴사해도 괜찮다는 것을 아는 데부터 시작이라고. 회사는 사랑하지 말고 적당히만 좋아하라고. 퇴사 후에도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을 열심히 준비하라고.


회사를 졸업한다는 개념으로 퇴사를 바라보는 자세가 실용적이어서 관련된  어떤 조언보다 명쾌했다. 다음 커리어를 생각해두지 않은 채, 돈도 많이 모아두지 않은 채 회사부터 그만둬버리면 생활비가 떨어지는 시기에 맞춰 행로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퇴사 이후를 준비하는 관점으로 바라보니 해야 할 것이 정리되었다. 어딘가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정해진 과업을 완수한 후 다른 곳에 입학할 수 있도록 내 상태와 상황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퇴사 이후에 어떻게 살아갈지 방법을 모색하고, 재정 상태를 체크해서 목표치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졸업을 유예해야 한다.


회사 이후의 삶, 회사 밖의 삶을 상상한 건 처음이었다. 여기가 아늑해서 잊고 있었다. 목표가 생기니 챙겨야 할 게 많았다.



Photo by Lukas Blazek on Unsplash



오랜만에 채용 사이트에 들렀다. 관심 분야 채용 공고를 확인해보니 어떤 부분의 이력을 더 채우면 될지 감이 왔다. 향후 커리어를 생각하면 홍보 업무를 해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상의해 업무를 조정했다.


일 년 차 이하일 때 퇴사하는 건 도저히 회사나 직무가 맞지 않고 맞추고 싶지도 않아서인 반면, 삼 년 차 정도가 지나 하게 되는 퇴사 고민은 결이 다르다.


어느 정도 하던 일에 익숙해졌지만 의미도 재미도 못 느낄 무렵 여기저기 누가 더 좋은 곳으로 이직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회사의 불합리한 점이나 선배의 부조리한 모습이 하나둘 체감되기 시작한다.


삼 년 정도를 큰 탈 없이 버텼다는 건 어느 정도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딴생각이 들기 시작한다면 이력서를 매년 새롭게 써보고 채용 공고를 꾸준히 확인하는 게 목표 설정에 도움이 된다.


이직이 아니라 창업이나 예술 쪽에 관심이 생긴다면 그 또한 막연히 생각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어디부터 시작할 수 있을지 정보를 찾아봐야 한다. 특히 비슷한 처지였으나 현재는 내가 원하는 업계에 가 있는 사람들의 과정을 참고하면 좋다.


한편, 회사 동료와 밖에서 만나는 일을 최대한 줄였다. 회식같이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술은 마시지 않는 걸 원칙으로 했다. 술은 한번 마실 때 감수해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의 소모가 너무 크다. 술자리에는 식사와 달리 최소 네 시간 이상을 쓰게 된다. 집에 가서도 쓰러져 자기 바쁘고 다음날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무언가를 할 수 없다.


또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 공통된 화제가 회사일 외엔 없어서 필연적으로 자리에 없는 사람이나 시스템 욕을 하며 위안을 얻는다. 보통 그런 대화는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는 위안으로 끝나버리지, 현실을 개선할 의지로 연결되지 않는다. 반복될수록 패배감과 적대감이 치석처럼 들러붙어버리는 것만 같다.


특히 팀장이 되고서는 절대 같은 팀 후배와 개인적으로 술자리를 갖지 않았다. 함께 취하고 나면 어쩐지 더 친해진 것 같은 마음이 들기에 업무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회사는 친구 만들려고 다니는 게 아니니까.


퇴사 준비를 하자 그에 필요한 목표액도 설정됐다. 입사 후 이 년간은 버는 대로 다 썼다. 카메라나 노트북 같은 걸 사고 여러 해를 입어도 망가지지 않는 옷과 신발을 샀다. 해외여행도 갔다. 누군가는 낭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 돈을 써보았기 때문에 불편함 없이 바로 신용카드를 없앨 수 있었으므로. 그동안 쓸 만큼 썼지, 수긍하며 자연스럽게 놓아졌다. 커진 씀씀이를 돌려놓는 데는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아껴둔 시간에 글을 썼다. 퇴근 후엔 영상 제작이나 카피라이팅 등 관심 있는 분야를 배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업계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만나자 얕은 연결고리가 생겼는데, 여기서 정보를 얻거나 업무에 종종 도움을 받았다.


회사에만 집중하다보면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게 되어 바깥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자꾸 잊게 되는데, 당연한  사실을 일깨울  있어서 좋았다.


이러한 과정은 회사일로 인한 고민들을 너무 심각하게만 받아들이지 않고 객관화하는 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이처럼 원하는 일이 있다면 퇴근 후의 시간을 써서 꾸준히 성과물을 내본 뒤 ‘갈아탈’ 가능성을 점치는 게 효율적이다.


퇴사 준비생이 바쁜 이유는 퇴사 준비를 하면서도 회사 생활도 평균 정도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양심적으로 월급 받는 만큼은 일해야 한다. 향후 이직할 때 평판 조회가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고. 게다가 회사에서 하루의 삼분의 일 이상을 보내는데, 이곳에서 부정적인 피드백을 주로 받게 되면, 퇴근 후 다른 과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소진돼버린다.


물론 돈이 많다면 이 모든 걸 고려할 필요 없이 퇴사부터 하고 천천히 앞날을 모색해도 되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런 건 우리에게 해당 사항이 없다.


핵심은 회사에 있을 때는 회사원으로 살지만 회사 바깥이 있다는  잊지 않는 것이다.


회사를 졸업할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여기 있는 동안 무엇을 얻어낼까 생각하는  잊지 않는다면, 자아는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만날  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자신의 몫을 다하는 일상에도

자아는 존재하니까.




이전 07화 몸에 꼭 맞는 불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