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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Mar 17. 2020

몸에 꼭 맞는 불행

편안하고 익숙한 불행을 오늘도 꺼내 입는 일



Photo by The Creative Exchange on Unsplash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숨막히는 어린 시절을 보낸 한 후배를 알고 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엄마로부터 “너만 없었어도 진작에 이 집구석을 탈출했다”거나 “너만 안 낳았어도 너희 아빠와는 이혼했을 거다” 같은 말을 자주 들었다. 


그녀에게는 엄마처럼 살게 될까봐 결혼하기 싫다는 마음과, 결혼을 해서 하루빨리 다른 곳으로 탈출하고 싶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아버지는 그녀가 딸로서 사근사근한 보살핌을 하는 역할을 맡아주길 바랐고, 그 기대가 어긋나는 날에는 폭력까지 일삼았다. 그런 날엔 어머니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날아갔다. 말 안 듣는 딸에 대한 분노는 ‘집에서 먹고 놀며 딸년 하나 교육도 안 시킨’ 아내에 대한 욕으로 흘렀다. 


그런 날엔 어김없었다. 통곡하는 소리, 벽에 부딪히는 소리, 퍽 하는 둔탁한 소리. 그런 유년 시절을 보냈기에 아버지만 보면 빠르게 뛰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자기 몸이 꼭 대형 스피커가 된 것 같았다고 했다.


그녀는 빨리 집을 탈출하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고 취업에도 성공했다. 똑소리나고 차분한 사람이라고 주변에선 말하곤 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녀의 어둠은 연애에서 자주 깊어졌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마치 남자친구를 통해 채우려는 듯 끝없이 연애했다. 그러지 않으면 외로움이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잘 알게 된 후 연애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연애를 시작하면서 상대를 알아가는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왜 이렇게 이상한 남자만 만나게 되는 걸까?’ 하는 고민이 언제나 머릿속을 휘저었다.


연애가 잘 안 풀리는 것 말고는 다른 일들에서는 자주 반짝거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의 부탁으로 연애 상담을 종종 해주었다. 보람은 없었다. 


연애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을 때 그녀는 언제나 금방이라도 새 각오를 할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나중에 물어보면 언제나 관계를 끝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실컷 함께 분노해주고 그 남자와 헤어져라 권유한 나는 허무해져서 언젠가부터는 그녀가 연애 이야기를 하면 살짝 흘려듣곤 했다.


시간이 지나 그녀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이젠 좋은 남자를 만났으려니 했다. 직접 청첩장을 주고 싶다는 제안에 우리는 만났다. 그녀의 예비신랑도 인사하러 올 거라고 했다.


“언니가 한번 보고 어떤지 말해줘요.” “이제 봐서 무슨 말을 하겠어? 청첩장까지 나온 마당에 내가 헤어지라고 하면 헤어질 거야?” 나는 농담했다.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갑작스럽게 아기가 들어서서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고 했다.


퇴근길에 들렀다는 예비신랑이 들어와 목례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목례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는데 노골적인 눈빛이 불쾌했다. 대화중 그는 자신이 굉장히 자신만만한 사람임을 과시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거들먹거렸다. 그리고 초면인 내 앞에서 후배를 면박주었다. 


“얘가 좀 무식해서요” “애엄마 되면 좋은 시절은 다 끝났죠”같이 그녀의 자존감을 짓누르는 말들. 


그녀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그저 웃었고, 나는 그녀가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것 같아 보여 속상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나에게 고민상담을 했던 연애 상대들은 대개 고만고만하게 별로였지만 이 사람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인 것 같았다.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그날 본 그녀는 결국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한 길을 가는 것처럼만 느껴져 불안했다.



Photo by Eutah Mizushima on Unsplash



나는 궁금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비슷한 불행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일까? 


왜 누구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붕어빵틀처럼 같은 인생을 살게 되어버리는 걸까?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세계에서 비명을 질렀으면서, 진절머리를 냈으면서도, 결국은 자석처럼 비슷한 세계를 끌어당기고야 마는 걸까?


넷플릭스 드라마 <너의 모든 것>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다정하고 친절한 남자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귀네비어 벡은 친구들과 만나 문득문득 불안해지는 심정을 고백한다. 남자친구의 첫사랑을 알게 되자 이 행복이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불길함이 든다고도. “남자친구에게 그여자는 평생의 짝이고 난 단지 스쳐가는 사람인 거 아닐까?” 질문하는 벡에게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러는 이유를 말해볼까? 작가로도 잘 풀리고 진짜 좋은 남자까지 만나니 뭔가 잘못됐다고 여기는 거야. 귀네비어 벡은 좋은 걸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기 인생에 대한 나쁜 예언자가 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예감을 항상 마음에 두고 끝없이 스스로와 주변을 의심한다. 좋은 일이 생기거나 괜찮은 사람을 만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만약 좋은 사람이 생기더라도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알게 되면 실망해 떠나가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꾸만 부정적인 예측을 한다. 너도 결국 똑같다, 너도 나를 떠날 것이다 같은 예측들. 상대를 의심하고 집착하면서 질리게 해 떠나보내고는 어쩐지 마음 깊은 곳에서 안도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파괴적 예언이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성장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이 어른이 된 후에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는 것. 프로이트는 이것을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고 표현했다. 


행복은 모르니까 두렵지만 불행은 내가 잘 알기에 익숙하다고 여긴다. 불행이 습관이 되면 오래 입은 잠옷처럼 편안해진다. 불행한 사람들은 행복 앞에서도 좋은 건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다가 가장 익숙한 불행을 꺼내 입는다.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사람이 부모 같은 삶을 살아가고, 상사처럼 일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뒷모습마저 그 사람을 닮아버리는 건 그래서다. 


시바타 쇼의 소설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행이 몇 종류인가 있을 거야, 분명. 그리고 사람은 거기서 자기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는 거지. 정말로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면, 그건 너무 잘 맞아서 쉬이 익숙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행복과 분간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자신의 인생을 두고 자꾸만 나쁜 예언을 하는 걸 그만두자. 불행한 아이였다고 해서 불행한 어른이 되란 법은 없다. 자기에겐 행복이 해당될 리 없다고 멀리하거나 행복 앞에서도 언제나 끝부터 생각하고 조바심을 내는 것. 


이런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잘 아는 불행과 모르는 행복 사이에서 애써 후자를 고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불길한 예언은 그만두고, 좋아 보이는 새 옷을 입은 채로, 함께 있으면 기분 좋은 사람을 만나자. 그런 선택이 쌓이다보면 언젠가 행복이 맞춤복처럼 편안해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 본 원고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은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부분적으로 각색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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