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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Oct 02. 2020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에는 상처가 묻어있다

콤플렉스와 트라우마 때문에 망가지기는 너무 쉽다

      

Photo by Christopher Sardegna on Unsplash



“혹시 검사 결과가 바뀔 수도 있나요?” 산부인과 의사가 “아들인 것 같네요”라고 말했을 때, 당황해서 결과가 바뀔 수도 있느냐는 말부터 내뱉었다. 의사는 대답 대신 웃었다. “아무래도 요즘은 다들 딸을 더 선호하시지요.”


집으로 돌아와 ‘성별반전’이라 검색한 다음, 맘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읽으며 희망을 가졌다. 한 달 뒤 다시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초음파 속 아이의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아…… 이쯤 되니 내 눈에도 보였다. 딸이라기엔 무언가 많이 튀어나왔구나.


곧 아들을 낳게 될 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내가 ‘아들맘’이 되는 건 상상해본 적 없다. 아이를 낳으면 조건 없이 사랑할 거라고 말해왔는데 그동안 내가 상상한 아이의 모습은 사실 언제나 딸이었다.


어릴 때 어른들이 말했다. 여자 팔자가 세면 집에 딸이 많다고. 엄마는 자기가 호랑이띠고 기가 세기 때문에 쓸데없이 딸을 자꾸 낳았다고 투정하곤 했다.


기 세다는 말이라면 어딜 가서도 적게 들은 편은 아니니까 나 또한 딸을 낳겠지 생각했던 것 같다. 게다가 나도 엄마와 같은 호랑이띠니까. 그렇다면 내 팔자엔 아들이 없겠군 했다.


딸을 낳으면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치렁치렁한 머리를 빗어주고 땋아주고 싶었다. 바비인형을 사주고 함께 인형놀이를 하고 싶었다. 레이스 치마를 입히고 새하얀 옷도, 꽃무늬 옷도 입혀주리라. 색깔별로 메리제인 에나멜 구두를 구비해서 공주처럼 꾸며주고 싶었다.


아이가 크면 조잘조잘 하루에 있었던 일들로 끊임없이 대화하고 싶었다. 함께 여행도 가고 쇼핑도 하면서 친구처럼 지내고 싶었다. 젠더 의식 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로망이 깨지고 난 뒤에는 내가 느낀 실망을 수습하는 데 시간을 써야 했다. 걱정과 당혹감에 자꾸 찔려서 멈춰 섰다. 곧 태어날 아이에게 이 감정이 전달될까봐 두려웠다. 이렇게까지 속상해하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이런 기분으로 아이를 만날 수는 없었다.


잠깐만, 내가 지금 왜 이렇게까지 실망하는 거지?


살면서 종종 그런 때가 찾아왔다. 부정적인 감정이 이상하리만치 커져서 그런  마음에 스스로 놀라는 때가.


나에게 피해를  사람도 없고 내가 피해 입은 상황이 아님에도 지나치게 불쾌해서 감정이 흔들리는 때가.


그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짜 이유가  튀어나오곤 했다.


우선 딸을 원한 이유부터 생각해보았다. 그동안 그렸던 딸의 모습은 핑크색과 레이스로 점철된 공주님이었는데, 그건 유년 시절에 간절히 원했던 내 모습이었다.


친구들이 바비인형을 가지고 노는 걸 보며 한번 만져보자는 말도 못하고 부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실용적인 짧은 머리, 물려받은 회색 옷에 질려 있었다.


훗날, 책에서 빨간머리 앤이 자기도 소매가 부푼 화려한 옷을 입고 싶다는 말을 하는 걸 보고 공감하다 못해 마음이 저릿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겪지 못한 유년을 딸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 잊고 있었는데, 결국 딸을 통해 감정이입하며 결핍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다. 딸은 나의 대리자가 아님에도 유치하게.


딸을 원했던 진짜 원인을 인정하고 나니 아들을 지나치게 거부했던 이유도 드러났다. 나는 80년대 경상도 특유의 남아선호사상이 깊은 문화에서 자랐기에 아들만 최고로 치고 성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모습이 지겨워서 절대 저렇게 되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내가 아들을 사랑하게 되면, 아들만 편애하는 이들과 같은 부류처럼 보일까봐 두려웠다. 딸을 귀하게 키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것 보라고,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고 외치고 싶었던 것도 같다.



Photo by Andrew Buchanan on Unsplash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했던 적은 또 있었다. 나는 한때 TV가 싫었고 그걸 많이 보는 사람조차 싫어했다. 특히 보는 사람이 없는데 TV가 켜져 있으면 머리가 아팠다.


고향에서 떠나와 혼자 살게 된 후에야 알았다. 그 불편함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내가 진짜 싫어했던 건 TV가 아니라 항상 그 소리가 들리던 집이었다.


거실에 누우면 쿰쿰하게 신발 냄새가 풍기던 좁은 집. 한쪽 벽은 TV가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부모님의 유일한 여가는 TV를 보는 것이었다. 아빠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리모컨부터 찾았고 잘 때도 TV 소리를 들어야 안심했다. 그게 서글프면서도 당장은 외면하고만 싶었다. 시험 기간이 아니어도 주황색 스펀지 재질의 귀마개를 하고 지냈다.


조용한 자취방에서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진짜 멀어지고 싶었던 건 TV가 아니라 집이었구나.


MC 강호동씨 때문에 한동안 괴로운 적도 있었다. 그가 한때 도사라는 콘셉트로 게스트를 불러 질문하는 코너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책상을 탁 치거나 게스트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압박감을 주는 걸 볼 때마다 마치 내가 봉변을 당한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디선가 풍기는 악취를 훅 맡은 것처럼 움찔했다. 이후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은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훗날 심리학 공부를 하고서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를 괴롭혔던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어른들을 떠올리게 해서 그토록 힘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더이상 그를 보아도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나에게 이유 없이 미움받은 사람들은 그 시기 내가 가장 벗어나고 싶었던 콤플렉스와 연관되어 있었다. 돌이켜보면 미워했던 사람의 리스트와 시기마다의 강렬한 결핍이 일치했다. 


한때는 부유한 부모 덕에 진학과 취업에서 치트키를 쓰는 것 같은 사람들을 경멸하는 데 에너지를 썼다. 직장에 다닐 땐 자기가 얼마나 회사에서 중요한지와 열심인지를 강하게 어필하는 사람을 보면 분노가 치밀었다. 그들의 사정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나고 나서 내가 그토록 화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도 실은 그렇게 티도 내고 인정도 받고 싶었다는 걸.


콤플렉스와 트라우마 때문에 망가지기는 너무 쉽다. 유년의 상처는 깊이 숨어 있다가 멀쩡해 보이는 어른이  후에도 한번씩 튀어나와 놀라게 한다.


그러나 불필요하게 다른 이를 미워하지 않을  있다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일도    있다.


자신도 납득하기 힘든 부정적 감정이 찾아올 , 멈춰서 원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근원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다보면 엉뚱한 이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일을 줄일  있으니까.


그러다보면 상처받은 나와 억울하게도 미움을 받고 있는 타인이 드러나며,  과정을 객관화할 수만 있다면 상처에서 벗어나는 길에 가까워진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미워하는 대상은 사실 나의 일부를 비추는 거울이라 말했다.


“우리가 어떤 인간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거지.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 법이니까.”



* 2019년에 아이를 낳았고,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지금은 그냥 흔한 아들 바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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