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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Feb 27. 2021

이 일만 하는 사람은 아니야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을 양손에 들고서


Photo by Erol Ahmed on Unsplash




직장인이자 글 쓰는 사람. 직장 생활을 할 때 나의 대표 자아는 둘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게 된 지금의 주요 자아 또한 여러 개다. 대표적으로 나는 글 쓰는 사람이자 아기 엄마다.


글쓰기와 직장 생활을 병행했을 때는 그것만으로도 벅차서 출산과 육아를 무기한 미뤄두었다. 그러다 십 년간 다닌 직장을 정리하며 비슷한 시기 임신을 계획했고 운좋게 같은 해에 아이가 생겼다.


여러 자아를 유지하면서 살면 어느 하나에만 올인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직장 생활을  때부터 이렇게 여러 자아를 유지할 필요성을 느꼈다. 회사가 힘들어서, 일을 잘 못해서,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회사 생활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때가 많았고 동료로부터 배운 것이 많았다. 프리젠테이션 기술과 협업 능력, 비즈니스 매너 같은 스킬도 단련할 수 있었다. 상사의 인정, 밀리지 않는 월급과 4대보험이 주는 안정감, 소속감과 유대감 같은 것들이 달콤해서 오래오래 회사 생활을 하고 싶던 적도 있다.


다만……


잘하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과해지면 앞만 보고 달리게 되는 것 같다. 열심히 하는 만큼 화가 자주 난다. 갑질을 당할 때, 불성실한 동료를 봤을 때, 일이 틀어졌을 때……


입으로는 퇴사한다 돌림노래를 부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다. 그 누구보다 오래 남게 되리라는 걸. ‘회사원인 나’에서 ‘회사원’을 빼면 남는 게 별로 없으니까. 심지어 친구조차도.


오 년 차 이상이 되자 저런 모습의 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짝이던 사람들, 여기가 아닌 어디에서라도 빛날 것 같던 사람들이 붙박이 가구가 되길 자처했다. 입만 열면 선배와 동료 욕을 하거나 후배를 괴롭히고 당연한 듯 다른 이의 성과를 가로챘다. 라인을 만들어 사내 정치를 하는 데 여념 없었다. 그들이 여기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는 건 두려움 때문이었다.


여기서 쫓겨날까봐, 지금보다 내려갈까봐. 물론 직장에 전부를 걸었을 때 성취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들도 있다.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의 저 모습이 내게도 당연해질까 두려웠다. 회사와 나를 적당히 분리하고 싶었다. 회사일을 대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몸이 회사 밖에 있을 때는 회사원이 아닌 다른 존재로 살고 싶었다.



Photo by Gabrielle Dickson on Unsplash




자아실현이니 뭐니 하지만 일단 직장은 돈 때문에 다니는 것이다.


월급을 받는다는 건 직업시장에서 연봉에 맞는 노동력의 가치를 측정하고 끝없이 평가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평가 받는 일만 하다보면 자신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우선인 세계에서 살게 된다.


물론 회사 생활을 오래하면서 인정받으면 결정권을 비롯한 이런저런 권한이 커진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팀플레이인 건 변함이 없다.


그래서 반대의 일이 필요했다. 숫자로 평가 받지 않는 일,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판단보다 나의 느낌이 우선인 일. 시작부터 마무리를 혼자 책임지는 일.


회사에 다닐 때 하루 평균 열 시간 정도는 직장인으로서의 자아를 유지하는 데 썼고 최소 하루 두 시간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데 썼다. 7 대 3 정도의 비율로 일상의 시간과 에너지를 구성하자 괴로운 일이 줄었다.


‘내가 이 일만 하는 사람은 아니야’라는 주문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속이 펄펄 끓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곧바로 상황에 몰입하면 더욱 열이 올랐다. 당분간 거리를 두고 한 김 식히는 게 정신건강에 좋았다.


회사원이기도 하지만 글 쓰는 사람이기도 하니 이 일을 기억해서 나중에 꼭 글을 써야지, 거기에 네놈 얘기는 꼭 넣어준다, 하고 뒤끝 있게 다짐하는 것이 차라리 더 도움이 됐다. 실제로 회사 생활에서 겪은 에피소드와 느낀 감정을 에세이로 쓴 적도 많다.


우리가 보통 분노를 이기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듯한 무력감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일정 부분 다독여졌다.


혹독한 현실을 마주했을 때 무언가 다른 방식으로 이를 표현하거나 잠시 덮어둘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내 경우는 그게 글이었다.


반면 글을 쓰며 막막할 때도 많았다. 대단한 사람들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영원히 뒤에서 박수만 칠까봐 두려웠다. 그럴 땐 직장인이니 다행이라고 위로했다. 돈은 다른 일로 버니 글쓰기로 빨리 승부를 봐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 정떨어질 일 없이 묵묵히 썼던 것 같다.


후에 책을 내고 나서 많은 독자들이 물어봤었다. 직장 생활과 글쓰기를 어떻게 병행할 수 있었느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적당히 거리를 유지해서 생활의 균형을 잡아가는 애매모호한 포지션이 롱런의 비법이었다. 직장 생활도 십 년 넘게 하고, 비슷한 시간 동안 글도 계속해서 쓸 수 있었던 비법.


대중매체에서도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자아로 활동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2019년 국민 MC라 불리는 유재석이 트로트를 부르는 유산슬이라는 부캐(또다른 캐릭터)로 대중 앞에 섰을 때 신인가수로서 경험하는 상황들과 그가 짓는 표정을 따라가는 것은 즐거웠다. 비록 콘셉트지만 프로그램 속에서 겪게 되는 일들은 그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던 신인 시절 같았다.


MC로 업계 최고 수준의 출연료를 받는 그가 지방공연 행사비로 50만 원을 제안 받았을 때, 최저가로 뮤직비디오를 찍어야 할 때, 평소에는 절대 입을 일 없는 반짝이 의상을 입었을 때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는 게 재밌었다. MC로서는 더 올라갈 곳 없는 연예인이 장르를 틀자 여기저기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신인이 된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개의 자아를 잘 운용할 수 있으면, 한 가지 자아를 접어야 하는 순간에 지나치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당장에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자책을 덜 하게 된다.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만 살게 되면, 그 자아가 실패했을 때 지나치게 상심하기가 너무 쉽다. 주요 자아를 하나만 두게 되면, 다른 자아들은 그 하나를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당하게 되기도 한다. 직장인으로서의 자아에만 중점을 두고 아빠라는 자아에는 소홀해서 아이와 멀어지거나, 직장인으로서의 자아에만 몰입해서 살다가 갑자기 은퇴를 하게 되면 주변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고 우울해하는 경우가 많듯이.


지금은 글 쓰는 게 직업이지만 작가라는 자아가 다른 모든 정체성에 우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을 위해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다른 기술도 연마한다.


육아할 때도 마찬가지. 나는 엄마지만 엄마만은 아니다. 이유식은 사서 먹이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개인 시간을 가능한 한 확보한다. 인생을 갈아넣지 않는다. 사람은 희생하는 만큼 본전 생각이 나게 되어 있으므로. 집착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지만 아이를 보면 자꾸 내 분신같이 여겨져 거리두기가 어렵다. 그러나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다양한 자아를 가지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익히고 싶다.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을 양손에 달걀처럼 들고서 오래 걷는 균형 감각이 인생에는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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