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만남 날이다. 정샘이 몇달 전부터 야심차게 준비한 책수다 모임인데ᆢ 온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다. 2시 49분에 벌써 "이제 슬슬 움직이세요. 3시반에 달토끼 책방에서 만나요"라고 메시지가 떴지만 3시 10분이 넘도록 교실에서 뭉기적거리고 있다. 동해역까지 가려면 족히 20분은 넘게 걸리는데 말이다.
이 녀석 말대로라면 난 바다에 가야한다. 가끔 쓸쓸한 기분이 들어 찔찔 짜기도 하지만 여전히 내 최애 충전 스팟인 까닭이다. 하지만 지금 난 동해역을 향해 악셀레이터를 힘차게 밟고 있다. 끝에서 두 번째로, 스물이 넘는 눈동자들의 쏠림을 감당하며 미니멀한 책방 안으로 몸을 숙여 들어간다. 그림책 <꼬마 시인의 하루>의 장혜진 작가가 슴슴하게 풀어놓는 책과 삶의 이야기. 감정소모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니면 그 책방이 몹시 아늑해서였을까? 눕고 싶을만큼 몸이 노곤하고 졸음이 쏟아진다. 퍼주기 좋아하신다는 손 큰 책방대표님표 내린 커피 한 잔과 달달구리 쿠키로 피곤을 애써 쫓으며 즉흥 이야기 이어쓰기를 한다. 자신을 닮은 캐릭터를 하나 그리고 첫 문장을 적은 종이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생각나는대로 다음 사람이 문장을 이어간다. 한 바퀴를 다 돌고 종이가 내게로 오면 이어진 문장 끝에 마지막으로 내가 마무리 글을 적는 거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데다 바다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끌어잡고 온 상태인터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오늘 포함 요근래 내 심리상태를 가장 잘 반영한 앵그리버드 비스무리한 생명체를 대충 그리고 해방의 열망을 담아 첫 문장을 "나는 높이 날아 올랐어."로 쓴다. 종이들이 돌기 시작하고 다른 샘들이 그리고 쓴 온갖 종류의 해괴하고도 찡하고도 따뜻한 상상력이 버무려진 작품에 찰나의 내 생각을 보태다보니 어느 순간 내 목소리가 커지고 웃음이 터져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나름 완성된 자신의 작품을 돌아가며 이야기하는 시간, 내 차례가 오자 나는 오늘 교실에서 우리반 아이들과 있었던 얘기를 나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이끌려 술술 불고 있었다. 내 부끄러운 자화상을 창피한 줄도 모르고 후배샘들 앞에서 말이다.
5교시 수업을 하지 못했다. 발단은 중간 놀이시간에 나 없는 교실서 벌어진 두 아이의 과격한 몸싸움이었으나 결론은 기가 센 아이들 등쌀에 내가 더는 못 버티고 소진되어 K.O.를 선언하고 만 거다, 못나게도ᆢ시월 들어 날이면 날마다 투닥투닥. 어떤 날은 하루 두 건씩. 판사가 되었다가 변호사가 되었다가 경찰이 되었다가 금쪽상담소장도 되었다가를 반복하다보니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흔들거린다 싶었다. 3월부터, 아니지 2월, 담임을 정할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고 예상했던 넘사벽, 초극강캐들이 우글거리는, 특급울트라군단을 스스로 선택해서 맡은 나다. 전교에서 유명짜한, 기피 1호 학급이었다. 소리도 냅다 질렀다가 카리스마로 눌러도 봤다가 햇볕정책도 써봤다가 온갖 재주를 넘으며 구미호 백단 실력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나였건만ᆢ그리고 진심 억울한 건 그 상꾸러기들을 그만 L.O.V.E!하게 되어버려서 어느 날 죽을만큼 지치고 힘들어도 결국은 집 갈땐 웃으며 녀석들을 보내주던 나였건만ᆢ
오늘은ᆢ 오늘은 무슨 마법에 걸렸는지 이 반복되는 징글징글한 상황이 도무지 넘어가지질 않는다. 그 두 녀석은, 당연한 얘기지만 호호깔깔 웃어대며 수다삼매경이거나, 식판을 깨끗이 비우고 와 스티커를 받아가는 등 무슨 일 있었냐는 버전인데 나만, 이 덜 떨어진 506호 나만 밥알이 넘어가지질 않는다. 눈치도 없는 녀석들! 3층 올라오는 층계참에서 가위바위보를 하겠답시고 뻔뻔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지를 않나, 5교시 생일잔치인데 칠판에 그림 그리고 꾸며도 되냐고 천진한 얼굴로 묻지를 않나, 아놔 진짜!!! 노력했다, 그런데 기분이 올라오지 않는 걸 어쩔 도리가 없다. 오은영 박사는 천 번 얘기해 주라고 했다더라. 나도 천 번은 안돼도 백 번은 말해준 것 같은데 정말 어쩌면 시월인 지금까지도 남녀 아이가 화가 난다고 서로의 소중한 부위에 발길질을 하고, 묵찌빠를 하며 같이 놀다가 자기를 놀리는 것 같아 기분 나쁘다며 갑자기 친구가 앉은 의자를 냅다 걷어찬단 말인가! 속상하고 화가 나다 못해 서글퍼진다.
생일인 아이를 조용히 불러(다행히 한 명이었다) 미안하다하고 양해를 구해본다. 도저히 이 마음 상태로 기타치며 생축노래를 부를 자신이 없노라고ᆢ상황이 정리되고 마음 추스른 뒤 내일은 꼭 생파를 해주겠노라고ᆢ
5교시 시작종이 울리고 아이들은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상황파악 중이고, 나는 덤덤하게 양심고백을 한다. 선생님이 아무리 어른이고 506호만큼 살고 선생이어도 바보 같을 때가 있어, 지금이 딱 그때야.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이 상황이 너무 속상하고 슬퍼서 울고 싶어. 아무것도 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겨. 이 기분으로 생일 잔치를 할 수가 없어. 이렇게 서로 날마다 죽일 듯이 싸우는 아이들은 너희가 처음이야. 정말 너무 힘들고 지쳐서 너희 담임을 하겠다고 한 걸 오늘 처음으로 후회했어(이 말은 끝내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 신이시여). 너희가 선생님이라면 이렇게 슬프고 힘들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좀 알려주라. 지금 샘은 아무 생각도 못하겠어.
서랍을 열고 종이를 나눠준다. 나도 모르게 즉흥적으로 한 생각이다.
장난식으로 쓰진 말아줘. 그럼 두 번 슬플 것 같아.
이말까지 하고 내 자리로 돌아와 엎드렸다.
모둠 친구들이 다 쓸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두미가 걷어서 가져다 줘.
메마른 내 목소리와 사각사각 연필 굴러가는 소리만이 교실을 가득 메운다. 3학년 열 살짜리들의 후덜덜한 반성 타임이다. 녀석들이 쓴 처방을 읽지 않아도 그순간 난 벌써 조금씩 마음이 풀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차를 두고 아이들 처방전이 들어온다. 숨소리도 숨죽인 가운데 울컥 내 콧등 시큰해지는 걸 다 들킬 것만 같은 순간이다. 아! 더는 못 버티고 그만 의자를 돌리고 만다. 눈가를 훔치는 내 모습을 아이들이 봐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내겐 너희들이 있구나.
천천히 일어나 칠판으로 간다.
여러분이 써준 여러 가지 방법들을 읽으며 눈물이 납니다. 왜냐면 그 글들이 벌써 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각자 가방 챙기고 시간 되면 모두 영특 갑니다. 내일엔 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로 학교에 올게요.
앵그리버드로 시작된 내 즉흥 그림책을 읽기도 전에 몇몇 샘 눈가가 촉촉해진다. 나도 찔끔 또 눈물이 난다. 어쩌면 난 함민복의 <흔들린다>처럼 흔들리지 않으려고 날마다 흔들리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