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1
밸런타인데이 (Valentines Day)
애정표현을 평소에 잘 안 하는 사람마저 이날 딱 하루만큼은 로맨틱한 사람으로 바뀌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날이다.
즉, 밸런타인의 분위기가 낭낭한 식당에서 아무리 서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느끼할 수도 있는) 눈으로 상대방을 쳐다보고,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평소에 남들이 보기엔 느끼한 멘트로 서로를 웃게 만들어도,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유일한 날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난 밸런타인데이를 '딸기 맛 페르소나가 밀크 초콜릿으로 코팅되어 대량 생산되는 날'이라고도 생각한다.
나 또한 그날만큼은 밀크초콜릿으로 코팅될 계획이다. 다만 맛이 살짝 다른...!
다아시는 10분째 열리고 닫히는 문을 보며 긴장되는 마음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다아시가 시간을 확인하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7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다.
"누구를 그렇게 기다리시는지...?"
기다리던 그녀가 그의 시선의 끝에 맺혔다.
"엘리자"
"다아시"
1년 만에 만난 둘 사이에는 달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일렁이는 촛불이 그 둘 사이를 밝혔다. 다아시와 엘리자는 자리에 앉았다.
"뭐 하시는 분이라고 했었던가요?"
"아, 저는 스위스에서 로봇공학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엘리자는요?"
"저는 뉴욕에서 패션디자이너를 하고 있어요."
"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처럼?"
"네. 물론 그것보단 규모가 훨씬 작긴 하지 만요." 엘리자가 와인이 든 유리잔을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옷을 괜히 잘 입으시는 게 아니네요. 평소보다 더 아름다우신 것 같군요."
"평소보다라니 우리 작년 밸런타인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잖아 집중해"
"스위스에서 로봇공학자라니. 기계를 잘 다루시나 봐요?" 엘리자가 턱을 괴며 물었다.
"아, 기계도 잘 다루지만 사람도 잘 다뤄요." 다아시가 눈썹을 들썩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제가 필요한 게 뭔지 알겠군요." 엘리자가 살며시 웃으며 잔을 다시 들어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제가 생각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군요."
"아마 맞을 거예요. 전 피넛이랑 버터라는 귀여운 기니피그 두 마리가 눈앞에 있기를 바라거든요."
적어놓고 보니까 좀 멀리간 것 같으니 여기서 멈추도록 하겠다.
미드와 영어 소설을 좀 많이 보다 보니 위에 적어 놓은 어투가 살짝 어색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밸런타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왜 저런 이야기가 나왔느냐...
혹시 '모던 패밀리'라는 미국 드라마를 본 사람이 있다면 아마 비슷한 장면이 떠올랐을 것이다. 모던 패밀리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재미있게 본 드라마인데 주인공인 '클레어'와 '필' (극 중 부부이다)이 밸런타인이 되면 '줄리아나'와 '클라이브'로 일종의 '역할극'을 한다. '필'은 원래 서투르고 어색하지만 '클라이브'로서 성공적인 사업가의 역할로, '클레어'는 본래 평범한 아내이지만 매력적이고 도도한 '줄리아나'의 역할을 소화하면서 서로의 평소와 다른 색다른 매력을 즐긴다.
이걸 보고 나니 이런 소소한 '역할극'을 해보면 재밌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역할극'이라니, 유치원 이후로 해본 적도 없고, 뭔가 어린아이들이 즐겨하는 놀이이다 보니 굉장히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때론 단순한 게 가장 재미있는 법이니까..)
'역할극' 자체도 재미있지만 그전에 어떤 캐릭터로 자신을 하루동안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상대방이 어떤 컨셉을 잡고 왔는지, 좋아하는 사람의 색다른 모습을 보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당돌함과는 거리가 살짝 있는 나에게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인 앤디처럼 당돌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 우상으로써 밸런타인데이에만 앤디의 자아를 빌려 잠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옷도 그날만큼은 니트를 벗어던지고 세련된 뉴욕의 성공한 사업가처럼 남색 롱코트를 입으며, 화장도 평소와 다르게 자신감이 넘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평소에 신지도 않는 힐을 신고서 작은 가방을 들고 머리는 한껏 고데기로 쫙 핀다음에 목도리를 두르고 나간다.
약속 시간이 7시라면 상대방을 애타게 해야 하니 거기서 한 3분 정도 늦게 문을 열고 (평소에는 시간관념에 굉장히 철저하다. 약속 시간에서 기본 15분 먼저 가 있는 사람으로 저 날에만 저러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당당하게 들어간다.
그리고 마치 세상에서 가장 바쁜 회사의 깐깐스러운 상사 밑에서 일하고 깨졌지만 그런 것 따위에는 기가 죽지 않는 여자로 겨우겨우 시간을 내서 온 것 마냥 자리에 앉을 것이다. (의도와는 다르게 굉장히 거만해지는 것 같다)
그러고는 상대가 무슨 역을 가지고 왔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겠지만 상대방과 재밌는 시간을 보낸다.
이처럼 우리는 할리우드 뺨치는 수준의 데이트를 즐길 것이다. (상대가 나랑 비슷하다는 가정 하에)
다른 사람들이 밸런타인을 딸기 맛으로 즐긴다면 우리는 단지 그 딸기 맛에다 슈팅스타를 첨가하는 것뿐이다. 생각보다 그리 크게 다른 건 없다.
이렇게 적고 보니 좀 유치해 보이기는 하지만 상상해보고 나면 솔직히 조금 재밌어 보이지 않는가.......?
준비물도 별거 없다. 비싸고 고급질 필요도 없으니 그저 집에서 조금 먼 식당 하나(가까우면 아는 사람들과 만날 수도 있으니 민망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랑 약간의 깡(?)이랄까...
처음에는 서로 민망하긴 하겠지만 한 번 하고 나면 두 번째 하는 것은 별 일도 아닐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식당은 좀 그렇고 집에서 해봐야겠다.....:)
Love is being stupid together
-Paul Valé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