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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Mar 14. 2020

제라늄과 따뜻한 남쪽 그리고 말벌

게스트하우스의 봄과 여름

겨울에서 봄


연남동에서의 첫 겨울엔 눈이 참 많이 왔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단독주택에서의 삶은 때로는 즐거운, 때로는 귀찮은 노동을 동반한다. 이를테면 눈이 오면 집앞의 눈을 반드시 쓸어야 한다는 것. 눈을 치우지 않으면 아주 곤란한 일이 생겼다. 우리집이 면한 도로가 북쪽이라 해가 거의 들지 않아 쌓인 눈이 꽝꽝 얼어붙어 아주 오랫동안 녹지 않고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을 대단히 불편하게 했다. 비단 우리 가족과 게스트들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쓸어야 한다. 눈이 그친 직후에말이다. 문제는 눈은 거의 언제나 새벽 5시에서 6시쯤 소리없이 그치고, 나는 보통 그 사실을 게스트들의 식사준비가 끝난 아침 8시가 되어서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나가보면 우리집 앞에만 눈이 덩그러니 쌓여있곤 했다.


눈과 난방비와 게스트하우스 오픈으로 고군분투하던 계절이 지나고 칼날같이 매섭던 바람에 봄내음이 나기 시작했다. 생애 첫 단독주택이어서였는지 내겐 연남동에서의 모든 계절이 특별하게 다가왔는데 그중에서도 봄이 더 그렇게 느껴졌다. 아마 땅에 더 가까이 살면서 눈과 귀가 더 예민해진 때문이 아닐까. 우리집, 옆집, 앞집, 뒷집엔 크던작던 마당이 있었고 나무와 꽃과 그걸 매일 살뜰히 가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을이면 마당 감나무에서 감을 한아름 따다 주시는 앞집 아주머니도 나를 만날 때면 "워뗘, 이 꽃 너무 이뿌지?" 하며 늘 자랑을 하시곤 했는데, 꽃나무에 들이는 정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눈높이에 늘 꽃이 있고 나무가 있고 그 위에 내려 앉아 지저귀는 새들이 있고 그 뒤로 하늘이 있다. 계절의 변화를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에 연남에서의 봄이 그렇게 내겐 특별했나보다. 나는 봄을 더 크게 느끼고 싶어 마당으로 나와 눈을 감고 해를 향해 기지개를 켜곤 했다.  


봄의 연남


봄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자 우리는 마당으로 봄을 사다 날랐다. 연남동 끝자락 작은 굴다리를 지나 사천교를 건너 모래내마트에서 알록달록한 봄꽃과 허브 들을 한아름 데려와 마당을 꾸몄다. 식물을 기르는 일에 자신있는 편은 아니지만 어쩐지 아파트 베란다에서보다는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라늄, 애플민트, 로즈마리를 새로 들이고 좁고 건조한 실내에서 겨우내 견딘 군자란, 천리향, 벤자민도 마당으로 옮겨 그간 목말랐을 햇살과 바람을 선물했다. 게스트들은 내가 소박하게 가꾼 정원에 앉아 종종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마당으로 봄을 사다 날랐다


연남동에서의 봄이 내게 특별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따뜻한 남쪽'이 있어서였다. 비영리사단법인 일상예술창작센터가 주최하는 따뜻한 남쪽이라는 이름의 플리마켓이 벚꽃이 필 무렵 시작해서 단풍이 질 무렵까지 한 달에 한 번 연남동 벚꽃길에서 열렸다. 3월 중순쯤 조만간 올해의 첫 번째 마을시장이 열릴 거라는 현수막이 나무에 걸리면 나는 막 설레기도 하고 어쩐지 안도하게 되었다. 정말로 봄이 잊지 않고 올해도 찾아와주었구나 하는. 따뜻한 남쪽 덕분에 나는 정말로 따뜻한 위로를 느끼곤 했는데 조금은 삭막하던 골목길이 그날만큼은 행복한 소란으로 들썩였기 때문이다. 나는 매월 이 특별한 이벤트를 기다려 게스트들과 함께 즐겼다. 내가 주로 샀던 것은 찻잔과 면기, 접시 같은 도자기류와 게스트하우스를 꾸밀 푸른 천이나 인도에서 건너왔을 법한 나무접시, 그림엽서 들이었다. 

아쉽게도 2017년 봄부터 따뜻한 남쪽은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그 사이 연남동의 집주인이 많이 바뀌었고, 아마 그들 중 누군가가 주차나 소음 등의 문제로 민원을 제기한 게 아닐까 싶다. 여전히 예전의 운치를 간직한 연남동이지만 어쩐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흔쾌히 이 작은 소란을 받아주었던 예전의 연남동이 그리운 건 사실이다.



그리운' 따뜻한남쪽'



봄에서 여름


2월에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한 이후 벚꽃 시즌을 거쳐 5월 첫주의 골든위크까지 꾸준히 예약이 있었고, 이후 잠시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가 6월부터 다시 예약이 들어왔다. 벚꽃 시즌에 가장 먼저 예약해주는 이들은 언제나 대만 사람들이었다. 오픈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아이리스'라는 이름으로 이메일이 왔다. 그녀는 벚꽃 시즌에 여섯 명의 친구들이 함께 묵을 수 있는 숙소를 찾고 있었고, 서울에 벚꽃이 언제 피는지를 알려달라고 했다. 용케 우리집을 발견해주어서 고마웠고, 벚꽃을 즐기러 서울에 오겠다는 데 놀랐다. 사람들은 벚꽃을 즐기러 교토로도 가지만 서울에도 온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한국의 드라마와 한국 음식을 너무나 사랑하고, 한국의 웬만한 산은 모두 올라가본 아이리스. 타이베이 송산공항 근처 회사의 커리어우먼인 그녀는 많은 친구들에게 서울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서울에 올 때마다 다른 친구들과 거의 비슷한 코스를 돌며 빽빽하게 짜온 스케줄을 완벽하게 소화하곤 했다. 그녀의 친구들과 우리는 함께 파전을 부쳐먹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을, 나는 동요 '별'을 불렀다. 아이리스의 친구인 쉐리는 내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가죽공예클래스에 참여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쇼퍼백을 만들었다. 키는 작지만 늘 에너지가 넘치는 쉐리는 타이베이의 유명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박사논문을 준비중이었다. 여행을 와서도 '공공미술의 사회적 기능'에 관한 다양한 예를 찾고 있기에 나는 서울의 여러 벽화거리를 소개해주었다. 나의 조언이 과연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타이베이로 돌아가 논문을 곧 완성해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나에게 길고 긴 편지(이메일이 아닌 진짜 편지)를 보내 고마움을 전해왔다. 


처음으로 함께 연남동 플리마켓을 즐겼던 게스트는 말레이시아에서 온 에릭이었다. 자동차 세일즈마케터이자 신실한 불교신자인 그는 처음에는 싱글로 왔고 다음에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에 성대한 약혼식을 했고, 그 후 1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집에 처음 왔을 때는 함께 연남동 플리마켓을 즐기고 베이징에서 온 부부와 함께 중국식 자장면을 만들어 먹었으며, 두 번째 왔을 때는 말레이시아의 '떤롱(추석등불행사)'에 쓰이는 등불을 함께 만들고 연남동 공원 잔디밭에 앉아 맥주를 마셨으며, 광장시장으로 한복을 사러 다녔다. 우리는 그들과 지금도 서로의 삶을 응원하며 페이스북으로 종종 안부를 전한다. 허심탄회하고 진실된 대화는 국경과 나이와 종교를 초월해 얼마든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에릭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여름, 연남


봄엔 제라늄을, 여름엔 수국을 들였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자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찾아왔다. 바로 말벌이다. 언젠가부터 2층 베란다의 한 구석에 말벌이 윙윙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처음엔 깜짝 놀라 피하기만 했는데 그저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일주일쯤 지나 다시 말벌을 마주쳤는데, 세상에 말벌이 우리집 외벽 한구석에 집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맨얼굴로 말벌에게 모기스프레이를 뿌리겠다는 것을 그러다 죽는다며 뜯어말리고 119에 신고를 했다. 결국 빨간 불자동차를 타고오신 늠름한 소방대원 여러분이 안전하게 퇴치해주시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여름 시즌의 정점은 8월 15일이다. 이 날은 우리에겐 광복절이지만 일본에겐 종전일이자 오봉일(우리의 추석으로 매년 8월 13-16일 즈음이 연휴다)이어서 이 시즌에 맞추어 Kpop 콘서트가 대거 열리기 때문이었다. 8월 15일 전후해서 우리집에 왔던 거의 모든 게스트들이 일본의 Kpop 팬들이었다. 그들은 콘서트나 음악방송, 쇼케이스, 팬사인회, 예능이나 드라마 촬영 스케줄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준코도 그중 한 명이었다. 치바현에서 남편과 친정식구들과 살고있는 그녀는 우리집에 3개월에 한 번쯤은 꼭 들렀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연차를 받아 오곤 했는데, 이렇게 자주 와도 괜찮은지 오히려 내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남편과 식구들이 얼마든지 그녀의 취미생활을 응원해 준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이 좋아한다며 우리가 수제로 만든 진저밀크티와 레몬티를 사가곤 했다. 


도쿄 근교 가와사키에 살고 있는 우에노 상도 두세 달에 한 번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꼭 우리집을 예약해 주었다. 대학에서 어학을 가르치며 박학다식한 지식과 한국 및 일본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우리 부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나는 그녀로부터 깊이 실감했다.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우리보다 족히 열 살은 많아 보이던 그녀는 과감하게도 이십대의 감성과 패션 스타일을 자랑하곤 했다. 알고보니 그녀 역시 열성적인 Kpop팬이었는데 가끔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나타나 웬만한 프로 사진가보다 훨씬 멋진 사진으로 우리를 깜짝 놀래키곤 했다. 


단독주택에서 경험하는 무더위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겨울에는 건조기를 두 시간쯤은 돌려야 겨우 마르던 빨래가 옥상에 널어놓으면 순식간이다. 바로 머리 위에 지붕이 있으니 2층의 더위는 1층에 비할 바가 못됐다. 그러나 1층의 복병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모기떼다. 땅과 가까워서일까, 모기떼가 하루종일 현관 앞에서 왱왱거린다. 모기장을 붙여놓아도 사람이 드나들때 그 틈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온다. 정수리를 태워버릴 것만 같은 태양과 당장이라도 끓어오를 것만 같은 아스팔트 위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던 8월이 그렇게 지나가고 마침내 9월이 왔다. 가을로 접어든다는 건 인테리어도, 이불도, 에어컨도, 정원도 동절기 모드로 슬슬 변화를 주거나 정리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간이 태풍이 찾아와 당장에라도 지붕이 뚫리고 집이 떠내려갈 것처럼 비를 퍼붓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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