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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Mar 23. 2020

한강과 자전거, 늦가을 휴가 그리고 난방비

게스트하우스의 가을과 겨울


여름에서 가을


잠자리를 처음 본 건 8월 중순쯤이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마당에 잠자리 몇 마리가 저공비행을 하고 있다. '아니 잠자리가 벌써 날아? 가을이 오려나.' 체크아웃 하는 게스트를 배웅하면서 공원길로 나서 보니 길가에 코스모스도 피어있다. 무더위에 지쳐 땅만 보고 다녔더니 가을이 소리없이 오고있는 걸 몰랐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즈음엔 서울을 느긋하게 즐기려는 여행자들이 특히 많았다. 사실 이들은 우리가 희망하는 게스트이기도 했는데, 우리는 오직 쇼핑이 목적인 여행자들보다 서울을 나름의 기준으로 다게 즐기는 이들이 왔으면 싶었다. 그런 여행자들에게는 우리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고,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도 많았다. 아무래도 2-3일 짧게 머무는 들보다는 5일 이상 머무는 여행자들이 느긋하게 여행하기 마련이었고 그들은 대개 북미, 유럽, 호주에서 온 이들이었다.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우리집에서 한강이 가까운지, 한강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묻는 게스트들이 더러 생겼다. 연남동에서 한강까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멀었는데 이곳으로 이사온 지 일 년이 다 되도록 한강에 가본 적이 없다 보니 나는 늘 택시를 타고 가라고 권해왔다. 무엇보다 교통편이 문제였는데, 한강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랄 수도 없고 한번에 가는 버스도 없었다. 이럴 땐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터였는데 문제는 내가 그 길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날 늦은 오후, 작정을 하고 한번 걸어서 한강까지 가보기로 했다. 모래내시장에 오갈 때마다 눈에 들어왔던 홍제천 산책로가 어쩌면 한강까지 이어져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운동화를 신고 생수 한 통을 들고 집을 나섰다. 사천교 아래 내부순환도로 교각 옆으로 난 긴 산책로에 들어서니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꽤 많은 주민들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그 길을 즐기고 있었다. 마포구에 이사온 지 일 년이 되어서야 이 길을 걸어보다니, 너무 주변에 무심했던 것을 반성하며 걷기 시작했다. 손을 앞뒤로 흔들며 한참을 걷다보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부순환로의 소음을 벗삼아 걷기 시작한 지 사십 분쯤 되었을까, 풍경이 달라지며 마침내 한강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 세상에 얼마만에 마주한 한강인지! 저녁놀이 드리운 마포의 한강이 한눈에 펼쳐졌다. 나는 연신 사진을 찍었다. 평화의공원에서는 가로등 주변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앉은 사람들이 기타를 치거나 치맥을 즐기고 있었고, 아름다운 불빛으로 물든 성산대교 아래에서도 운동을 하거나 쉬고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토록 운치 있는 풍경이라니! 이렇게나 가까운 한강이라니! 여길 이제야 와보다니! 나는 감격했다. 무엇보다 우리 게스트하우스의 몇몇 단점을 조금은 커버할 수 있겠다는 기쁨이 있었고, 택시를 타지 않고도 걸어서 40분, 자전거로는 20분이면 올 수 있는 곳이어서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집에 오는 모든 여행자에게 한강에 꼭 가볼 것을 권하고싶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한강에 가고싶어하는 여행자들에게 자신있게 길을 알려줄 수 있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보이는 어린 아들과 여행중이던 호주의 스테판은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늘 한강에 조깅을 다녀오곤 했다. 프랑스에서 온 샤를로뜨도 한강 공원 산책을 좋아했으며 우리에게 자전거를 빌려 한강을 다녀온 이들도 많았다. 


게스트들은 우리의 자전거를 빌려 한강에 다녀오곤 했다



가을, 연남


가을이 오기도 전에 9월과 10월의 모든 방이 거의 풀부킹이 되었다. 우리집을 포함한 연남동의 게스트하우스들은 봄철 못지않게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다. 오버부킹으로 다른 게스트하우스의 손님을 받기도 하고, 내 손님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도 했다. 추석연휴를 기점으로 서울로 쏟아져들어온 게스트들은 여의도의 불꽃축제와 서울억새축제를 즐겼고, 단풍을 보러 설악산에 가기도 했다. 봄에 왔던 대만의 아이리스도 내장산의 단풍을 보러 다시 찾았다. 우리는 게스트들과 만두를 빚어먹고 윷놀이를 하며 놀았다. 치킨집에 몰려가거나 영화관에 가기도 했다. 가을의 모든 날이 축제같았다.


추석 명절 아침에는 게스트들의 아침식사를 식탁에 차려놓고 조용히 빠져나갔다. 다행히 시댁과 친정이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고, 어른들은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도 이해해주셨다. 아침식사는 시댁에서, 점심식사는 친정에서 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긴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다시 엉덩이를 일으켜야만 했다. 이런 날에도 어김없이 체크인이 있고, 청소와 빨래는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당신들은 언제 쉬나요? 주말도, 연휴도, 명절도 없이 일을 하면 언제 쉬어요?" 

게스트들에게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는 예약이 없는 날 쉰다. 예약이 없는 날, 갑자기 예약이 취소되는 날, 비시즌인 주간, 그때가 게스트하우스 주인장들의 주말이고 휴가다. 그런 날에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나가거나 근교로 여행을 가기도 한다. 


가을에서 겨울


단풍이 더 빨개지고 은행잎이 더 노래지던 날 올해의 마지막 '따뜻한 남쪽'이 열렸다. 이제 추운 계절을 무사히 잘 지내는 일만 남았다. 더 추워지면 산책을 다니지 못할 것이었으므로 나는 틈이 날 때마다 경의선숲길공원에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 아래 노란 길을 거닐었다.


감사하게도 2월에 오픈하자마자 10월말까지 꾸준히 게스트가 와주었고, 덕분에 늘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밤늦게 체크인 하는 게스트를 기다리느라 꾸벅꾸벅 졸고, 새벽같이 체크인 하는 게스트를 맞이하느라 잠을 설치고, 게스트와 함께 거실을 공유하느라 늘 신경을 썼던 터라 며칠만이라도 문을 닫고  마음 편히 쉬고싶었다. 그때 우리의 생각은 이랬다. '11월은 보나마나 비수기일 것이고, 12월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시즌에야 다시 예약이 들어오지 않겠어?' 


과감하게 열흘 간 문을 닫기로 했다. 그리고 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늦가을의 조용한 연남동 끝자락에서 한여름의 에너제틱한 방콕으로의 여행은 지친 우리에게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우리는 열흘을 꽉 채워 느긋하고 행복하고 맛있는 휴가를 보냈다. 그런 와중에도 땅을 치며 후회한 일이 있었으니 알고보니 11월은 비수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예약이 가능하냐는 문의가 방콕에서도 쏟아져들어왔고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다른 게스트하우스를 소개해줘야만 했으니말이다.


한여름에서 다시 늦가을로 복귀한 뒤 나는 본격적인 겨울 준비에 들어갔다. 두꺼운 이불로 교체하고, 크리스마스 화초 포인세티아를 사서 공용공간에 올려두고 그 옆에 작은 스탠드와 따뜻한 무릎담요도 놓아두었다. 마당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며두었다.


최대한 아늑하게 만들고 싶었다


겨울, 연남


비교적 여유로운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시즌 그리고 설연휴 전후로 반짝 바빴던 것을 제외하면. 일 년쯤 지나봐야 우리집의 성수기와 비성수기가 언제인지 비로소 알 수 있다더니, 정말 그랬다. 과연 짐작과 달리 우리 게스트하우스의 비성수기는 11월이 아니라 1월이었다. 다행스러운 건 3월까지도 예약이 별로 없는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비해 우리집엔 그래도 2월중순부터 꾸준히 예약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1월이 확실한 비성수기라는 걸 알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1월달 난방비가 자그마치 104만 원이 나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예약이 띄엄띄엄 들어와 오늘은 싱글룸에 내일은 더블룸에 한두명씩 머물다보니 수입에 비해 난방비가 오버된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난방조절기를 게스트들이 찜질방 수준으로 높이 올려놓은 것이었다. 나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우선 게스트들이 임의대로 온도를 조절하지 못하도록 난방조절기의 위치를 옮겼다. 다음으로 게스트가 띄엄띄엄 오는 문제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일정 기간만 오픈해놓고, 차라리 닫는게 낫겠다 싶었다. 한여름의 전기세는 나를 깜짝 놀래켰지만 한겨울의 난방비는 나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그 후 다른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을 만날 때면 전기세나 난방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묻곤 했는데, 몇 가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한 분은 객실이 스무 개쯤 되는 게스트하우스의 사장님이었는데 건물을 신축한 케이스였다. 이분은 처음부터 태양열 집열판을 옥상에 설치해 전기세를 낮추었고, 객실마다 마치 호텔처럼 외출시 저절로 전원이 꺼지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두었다. 신축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종종 외출시 에어컨을 끄는 것을 잊는 게스트가 있는데, 이런 상황을 방지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언젠가 게스트하우스 건물을 신축하게 된다면 꼭 그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또 한 분은 객실이 네다섯 개 정도인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분이었는데 아무래도 가스비보다 전기세가 저렴하므로 난방은 20도로 균일하게 맞춰놓고, 에어컨 대신 냉난방기를 달아 차라리 온풍을 틀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 또한 무릎을 탁 칠 만큼 멋진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이미 모든 방에 에어컨을 달아놓았기 때문에 이 조언이 소용이 되지 않았을 뿐. 또 다른 사장님은 우리의 현실에 가장 부합한 조언을 해주었다. 이분은 2월부터 12월까지 열심히 일하고 매년 1월에는 다른 나라로 긴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우리는 이분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2월이 되자 다시 벚꽃 예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또 한번 겨울의 때를 툭툭 털고 새봄맞이 준비에 돌입했다. 

우리에게 두 번째 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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