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를 펼쳐 가져온 짐들을 테이블 위에 사용하기 좋게 정리한다. 책과 태블릿, 스마트폰 충전기를 꺼내고, 내일 입을 옷가지들은 옷걸이에 잘 걸어둔다. 샤워를 한 뒤 맥주를 한잔 하며 TV를 보거나 태블릿으로 이메일을 확인한다. 우리가 오늘 머물게 될 이 더블룸에는 더블침대, 간이의자와 스탠드, TV, 에어컨, 거울과 테이블, 드라이기, 옷걸이, 휴지통이 구비되어 있다. 테이블 위에는 게스트에게 제공되는 네 개의 타올이 가지런히 접혀있고, 침대 머리맡에는 예쁜 액자가 걸려있다.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니 연남동 골목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연인들, 동네 어르신들, 길고양이가 느릿느릿 거니는 거리 풍경은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더 정겨워 보인다. 나는 제법 포근해진 밤공기를 들이마신다.
오늘 우리가 예약한 방은 우리 게스트하우스의 2층 더블룸이다. 비시즌이거나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게스트들의 방을 돌아가며 하루씩 지내본다. 그러면 잠깐 있어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던 것들이 보이고, 들린다. 새벽부터 밤까지 꼬박 하루를 여행자로 지내봐야 개선해야 할 점, 충분히 좋은 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물리적인 점검이다. 침대는 편안한가? 트렁크를 모두 펼쳐놓고도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은가? 옷걸이와 콘센트, 수납 공간은 충분한가? 에어컨 바람이 한 곳으로만 치우치진 않나? 난방 온도는 적당한가? 공용공간이나 화장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내부 소음과 집 밖에서 들려오는 외부 소음은? 혹시 숙면을 방해하는 다른 요인은 없나? 샤워할 때 옷이나 개인물건을 수납할 공간은 적당한가? 공용공간은 사용하기에 편리한가? 등을 살펴본다. 다음으로는 정서적인 점검이다. 햇살, 창밖의 뷰, 조명, 인테리어 등 전반적으로 아늑하고, 정서적 안정감이 드는지? 그래서 다음에도 이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만약 우리집이 호텔처럼 모든 방이 똑같은 구조였다면 일일이 묵어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집은 단독주택인 데다 1층은 40년 전에, 2층은 20년 전에 지어져 1, 2층의 구조는 물론, 방마다 크기도, 배치도, 창문 방향도, 뷰도 완전히 달랐다. 모든 방은 나름의 매력이 있었고, 우리가 느꼈던 그 방만의 매력을 게스트도 공감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인테리어에 반영했다. 그렇게 완성한 여행자의 방에서 실제로 묵어보며 정기적으로 점검을 해보는 것이다. 여름의 방과 겨울의 방은 또 다르니까.
더블룸에서 하루를 지내보니 방이 작긴 해도 아늑한 맛이 있고, 해가 잘 들어 빨래도 잘 마를 것 같고(게스트들은 매일같이 엄청나게 많은 손빨래를 한다. 어쩜 그렇게도 부지런한지), 창 밖으로 보이는 연남동 골목길 풍경과 그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정겨웠다. 다만 새벽에 자꾸 야옹야옹 우는 고양이 때문에 몇 번 뒤척이긴 했다.
여행자의 방으로 여행을 떠나보고서야 알게 된 것들이 있다. 1층에서 올라오는 소리, 거실에서 다른 게스트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려 당황했다. 밤 9시 이후로는 더 조심하도록 일러둘 필요가 있었다. 샤워부스에도 개인물품을 올려놓을 공간이 부족했다. 방문을 여닫는 소리도 크게들려 뭔가 조치를 취해야했다. 트렁크를 펼쳐놓고 보니 방의 공간도 여유가 없어 침대의 위치를 수정해야 했다. 사실 이 모든 고민을 한번에 해결할 방법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2층은 가급적 6명 단체예약을 우선적으로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동안 1인실, 2인실, 3인실을 따로따로 예약을 받아 왔던 것을, 점검 이후 6인실 예약도 가능하도록 추가 조치했다(만약 6인실이 예약되면 오버부킹이 되지 않도록 그 즉시 1인실, 2인실, 3인실을 바로 닫았다). 이후 친구들끼리, 가족끼리 6인실을 예약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들은 과연 만족도도 높았다. 물론 관리하는 나는 더 편해졌다.
비성수기 시즌이라 게스트하우스에 아무도 없던 어느 날 남편과 나는 각 방을 썼다. 마치 혼자 여행을 온 것처럼 하루쯤 각자 지내보기로 한 것이다. 혼자 여행은 재미도 없고 무섭기도 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터라 마침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읽을 책들과 다이어리를 챙겨 2층의 싱글룸에, 남편은 전자책을 챙겨 1층의 싱글룸에서 묵으며 각자의 밤을 보냈다. 낯설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 자유롭기도 한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늦도록 책을 읽다가 꿀잠을 잤다. 그리고 아침에는 거실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며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리모델링 공사를 모두 끝내고 마침내 생애 첫 '내 집'에 이사를 오던 날, 우리는 '내 집 마련'과 '게스트하우스 라는 평생 직장 마련'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2층 거실에 노트북을 연결해놓고 와인을 마시며 <레드 바이올린>이라는 영화를 봤다. 이사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아쉽게도 중간에 잠들고 말았지만. 그 이후 2층 거실에 머물 기회가 여간해서 없었는데, '혼자 여행' 덕분에 2층 거실을 독차지하고 오랜만에 여유있게 즐길 수 있었다.
'여행자의 방으로 떠나는 여행' 덕분에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우리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여행자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