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밥을 먹을 생각은 없었다. 고소장만 가져다주고 바로 집에 가도 9시. 피곤할 것이 뻔했다. 힘드니 오지 말라는 엄마 말대로 그냥 집으로 가버릴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엄마의 기운없는 목소리를 들으니 귀찮다고 안 갈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사기꾼을 고소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이 오죽할까. 내가 간다고 달라질 건 없었지만 고소장이 아니라도 엄마가 있는 곳으로 퇴근할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밥을 달라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점점 가슴 한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텅 빈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기다리는 곳으로 간다, 나 혼자 대충 한 끼 때우는 게 아니라 엄마랑 마주보고 밥을 먹는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고소장을 갖다주러 가는 날선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공단의 한 건물 지하로 내려가자 열린 문 틈으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식당 영업이 끝난 시간, 엄마는 내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뒀을 것이다. 주말마다 보는 엄마지만, 식당으로 내가 온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나, 도착하니 엄마는 근사한 밥상을 차려두고 있었다. 아까 기운 없는 목소리로 전화받던 사람이 정말 맞는 걸까. 삼겹살에 마늘, 파를 구워서 내온 엄마는 상추, 깻잎, 김치, 고추까지 야무지게 곁들여서 근사한 밥상을 차려주었다. 그냥 있는 반찬에 밥이나 달라는 거였는데…….
엄마를 부려먹었다는 생각에 미안해지긴 했지만 씩씩한 엄마를 보는 내 마음은 좋았다. 엄마가 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은 잠시나마 고소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고소장 쓰기를 내게 맡겨놓았다는 미안함도 잊고 부지런히 손만 움직였기를 바랐다. 나는 짐짓 태연하게 "진수성찬이네. 뭘 이렇게 차렸어." 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밥을 먹는 내 앞에 앉은 엄마는 고소장을 들춰봤다. 3년 전에 고소했어야 할 세 번째 사기꾼에 대한 형사 고소장. 그를 이제야 고소하게 된 것은 돈을 줄 거라고 조금은 믿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카드깡을 하다 감옥에 잡혀가서 어디 도망도 못 가는 인간이었다. 우리는 이미 다른 사기꾼 두 명을 고소하며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고, 그만큼은 고소 없이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다.
결국 엄마는 또 사기꾼 세 놈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들이 앗아간 돈 때문에 멀쩡하던 집을 팔고 숙식제공되는 공단의 식당으로 와 웅크리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기가 막힌다고 했다.
"나도 이제 그만 일하고 싶어. 아침에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편하게 좀 살고 싶었어. 그런데 이렇게 더 심한 굴레에 갇혀버리다니..."
슬프면서도 엄마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혼자 몸으로 자식 둘 키우면서 한 번도 일을 쉰 적 없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아침 늦잠을 자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니... 나도 엄마를 참 몰랐구나.
슬픈 엄마를 일으켜세우려다 나 역시 지쳐버린 마음으로 집으로 가는 길, 엄마를 이 냉골에 두고 가야 한다는 것이 슬프게만 느껴졌다.
고소장에 '이 일로 가족이 풍비박산 났다'는 말을 쓴 적이 있다. 모든 게 비바람에 날아가 흩어져버린 상태. 사기는 우리 가족을 뿔뿔이 흩어놨다. 이제 엄마와 나는 같이 있고 싶어도 다른 곳에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서로가 기다리는 곳으로 퇴근하고 마주앉아 밥을 먹을 수 없다. 풍비박산이란 말을 실감하게 될 줄이야.
사기를 당한 뒤에도 우리는 5평 집에 붙어 살았지만, 엄마는 늘 그곳이 '내 집'이지, '자기 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른 몸이 나아서 나에게 그 공간을 온전히 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픈 몸을 끌고 굳이 숙식 제공되는 식당으로 취직한 것이다. 작년에 잠시 일했던 곳도 그랬고, 지금 일하는 곳도 먹고 자고 하면서 밥을 해주는 곳이다. 엄마에겐 평생 고생하며 일한 대가가 이거였다.
우리가 사기로 인해 잃은 게 많지만 그중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있을 수 있는 공간. 아마 그들은 평생 모를 것이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누군가가 평생 힘들게 번 돈을 뺏는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엄마를 홀로 두고 가는 밤길, 나는 절대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